### 폐허된 서울서 육영수와 데이트 ###.
"어떻게 저처럼 충만하게 보일까".
박정희와 육영수는 출신 배경이 너무나 달랐다. 육종관의 선친은 대
지주였기 때문에 동학농민봉기의 공격대상이었던 데 대해 박정희의 선
친은 동학봉기에 가담하고 있었다. 마주칠 일이 없었던 두 사람을 맺어
준것은 민족 대이동을 일으킨 전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김일성이 두
사람을 중매한 셈이다. 박정희는 육영수와 약혼식을 올린 며칠 뒤 육본
트럭행렬을 따라 서울로 향했다. 육군 수뇌부는 시흥을 거쳐 파괴된 한
강인도교 밑에 난 부교를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전투정보과는 지금외
환은행 자리에 있던 건물로 들어갔다. 당시 상황실 장교이던 서정순 대
위(정보부 차장 역임)는 "그때는 정말 신나는 계절이었다"고 말했다.
"인민군 포로들을 붙들어서 신문하여 정보를 수집해 파죽지세로 북
진하는 국군 부대한테 적정을 알려주려고 하면 이미 전선은 저만큼 북
상하여 구문이 되는 실정이었습니다. 중공군에 대한 정보는 주로미군
정보에 의존했습니다. 만주에 중공군 대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였
습니다만 미군은 그들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엔 불안해지더군요. 전투정보과 상황판
에 중공 야전군의 중국내 이동경로가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정보국에서는 귀순한 인민군 통신병들을 이용하여 적의 통신을
엿듣고 있었다. 한 통신병은 평양에서 김책 전선사령관에게 보내는 암
호문을 해독했다. 장도영 국장은 김책과 거의 동시에 그 명령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인민군의 방어선과 병력배치 상황 및 단계적 철수선을
미리 알고 그들이 계획한 방어진지를 국군이 먼저 점령해버려 철수작전
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1950년 10월은 결혼을 앞두고 데이트에 열중하던 박정희나 육영수뿐
아니라 국군장병과 민족 전체를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가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다. 가슴 설레던 그해 10월의 나날들을 떠
올리면 자동적으로 되살아나는 멜로디가 있다. '전우야 잘자라'. 작사
가 유호(본명 유해준·77)는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있다가 한
강을 넘지 못하고 적치하에서 숨어서 살았다. 9·28수복 뒤 신문사로
나갔다. 문화부는 당분간 쉬라고 했다. 그래도 회사에는 매일 나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거리에서 작곡가 박시춘을 만났다. 밀짚으로 만든 벙
거지를 쓰고 있는데 거지꼴이었다. 피란길에서 돌아온 박시춘과 유호는
명동에서 술을 한 잔 나눈 뒤 필동에 있던 박씨의 집으로 옮겨 통음을
했다. 피란살이, 후퇴, 낙동강 전선, 국군, 북진 이야기를 하다가 즉석
에서 유호가 노랫말을 만들고 박시춘이 기타를 쳐가면서 작곡한 것이
'전우야 잘자라'였다.
〈 1절.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
라우리는 전진한다 /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2절.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
어 먹던 /화랑담배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3절.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 한강수야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4절.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
너진다 /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북진 장병의 주제곡이 되었던 이 노래는 중공군의 침입
으로 후퇴할 무렵에는 육본에 의해서 금지곡이 된다. 육군에서는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란 대목이 불길하다는 것이었다. 휴전
이후에 이 노래는 복권되었다. 한편 국군은 인민군 포로들을 잡으면
'신라의 달밤'을 불러보게 했다. 부를 줄 아는 포로는 남한에서 동원한
의용군, 못 부르는 포로는 진짜 인민군으로 분류되는 수도 있었다.
박정희는 서울로 올라오자 맨처음 육영수의 큰 언니 육인순의 집을
찾아갔다. 어느 날 육인순이 마당에서 그릇을 씻고 있는데 한 군인이
마당으로 들어서는 걸 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동생이 군인과
약혼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는데 '저 사람이라면 아닌데'하는 실망감
이 엄습해왔다. 그런데 두리번거리고 서있는 운전병을 따라서 키가 작
은 장교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육인순은 '그러면 그렇지'하고 마음을
놓았다. 박정희는 차 대접을 받았다. 육인순의 남편 홍순일이 납북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박정희는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물을 닦았다.
"남편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큼 힘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육인순은 박정희를 본 뒤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이란 평을 했다.
그 며칠 뒤 박정희 중령은 서울고등학교 수학선생이던 육인수의 집을
찾아갔다. 집의 위치는 육영수가 알려주었다. 이 집은 뒷문이 앞문보다
커보였다.
"하루는 마당에 나가 있는데 누가 뒷문을 열고 들어와요. '어디서
오셨습니까'하고 물으니까 '저 박정희라고 합니다'하며 인사를 해요.그
래서 알게 되었지요.".
그 며칠 뒤 육영수가 올라와 오빠 집의 2층 방에 머물렀다. 육영수
가 물었다.
"오빠, 그 사람 어때요?"
"키도 참 작더구나. 그런데 사람 하나는 다부지게 생겼더라. 인상은
좋더구나.".
포화를 견디고 남은 가로수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서울거리에서
두 사람은 자주 만났다. 박정희와 데이트를 하고 나면 육영수는 사직동
언니집으로 오곤 했다. "재미 있었니?"하고 물어보니 "제가 핸드백이
없는걸 알고 며칠 뒤에 만나서 핸드백을 사준다는데 부끄러웠어요"라고
하며 얼굴을 붉혔다. 며칠 뒤 박정희가 육영수를 데이트에 데리러 가려
고 육인순의 집에 나타났다. 차녀 홍소자는 그 순간의 육영수를 기억한
다.
"부끄럽다거나 내숭있는 표정이 아니라 맑고 투명한 표정으로 박정
희씨를 맞이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 전시의 들뜨고 불안하고 뒤죽박
죽이던 시절에도 안정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연애시절은 젊은 청춘남녀의 불타는 사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인네들
의 로맨스도아니고 참 신기했어요. 성숙된 인격의 만남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훗날 와서 생각합니다.".
육인수는 "두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부자연스러운 데가 없이 충만하
게 보일까"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계속).
(조갑제 출판부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