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터져 구혼하던 남자 연락끊겨 ##.
육영수는 배화여고 학생 시절 일본으로 단체 수학여행을 가려다가 아
버지 육종관의 반대에 부딪힌 적이 있었다. 육종관은 "과년한 처녀가 여
행이라니"라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육영수는 졸업하기 1년 전에 상급학
교로 진학하는 문제로 아버지에게 말을 꺼냈다가 매정하게 거절당했다.
"여자가 공부하면 공연히 건방져진다"는 것이었다. 육영수는 이불을 뒤
집어쓰고 며칠을 울었다. 육영수의 동생 예수도 퇴짜를 맞았다. 육종관
으로서는 18명의 자녀들에 대한 공평한 기준을 양보하고 싶지 않았을 것
이다. 남자는 대학까지, 여자는 고등학교까지 교육시킨다는 원칙을 그는
견지했다. 1942년3월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육영수는 옥천 교
동집으로 내려왔다. '작은 아씨'라고 불렸던 육영수는 좀처럼 집 바깥을
나가지않으려 했다. 육종관은 그런 딸이 대견했던지 금고 열쇠를 맡기고
경리를 보게 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외출하고 난 뒤였다. 어머니 이경령
이 돈이 급하게 필요해서 영수를 불렀다. 육영수는 그러나 "아버님의 허
락없이는 금고를 열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런 딸이 오히려
미더웠던지 이경령은 "영수는 어디 가나 귀여움 받고 잘 살거야"라고 말
하곤 했다.
"넉넉한 집안에 가면 허세부리지 않고 잘 살 것이고, 가난한 집안에
시집가더라도 초라하지 않게 불평없이 잘 살거야.".
이 무렵 육종관은 전국의 고물상을 뒤져 값싼 기계류 부속품을 사들
인 뒤 기름칠하여 새 기계처럼 조립하는 취미에 빠져 있었다. 이런 식으
로 조립한 라디오가 30여 대나 되었다. 아버지가 "영수야, 이거 닦자"라
고 하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마루에 앉아 종일 녹을 닦곤 했다. 오빠
육인수의 회고--.
"아버님께서 아침에 이것을 닦아 놓으라고 하시면 종일 그 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을성이 대단했습니다. 무엇이나 대충대충 하는 법이 없
었습니다.".
그러나 육영수가 진정으로 즐겁게 그런 일을 한 것같지만은 않다. 쌓
이는 좌절감을 녹을 닦는 것으로 풀었을 것이다. 육영수는 그런 일에 자
학적으로 몰입하기도 했다. 동생 육예수의 증언.
"언니는 위장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는데도 우리 식구 중 누구도 알지
못했어요. 아버지가 일을 시키면 아프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시키는 일
만 했어요. 하루는 하도 얼굴이 창백해서 아버지가 물었는데도 별일이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나중에 알았는데 언니는 밥도 못먹을 정도로 병
이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아프다고 일을 중단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
지 않은 것이지요.".
아버지를 돕는 일이 끝나면 자수를 놓고 어머니와 함께 바느질을 했
다. 자수틀 앞에 앉을 때 육영수는 늘 손을 씻고 옷매무새를 여미는 것
이었다. 그녀는 옷도 직접 만들어 입었다. 헌 옷을 머슴집에 보낼 때는
꼭 누구한테준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
기 때문에 오히려 더 어려운 사람이 육영수였다. 육영수의 큰 언니 육인
순은 1935년10월 춘천의 홍순일과 결혼했다. 그는 춘천고보, 경성제국대
학 법문학부를 거쳐 만주국의 마정국 과장, 해방 후 강원도 소방청장,허
정 교통부장관 비서실장을 지내다가 6·25사변 때 납북되었다.
육인순-홍순일 사이에 태어난 장남 홍세표는 현재 외환은행장, 장녀
은표는 장덕진(전 농수산부장관)의 부인, 차녀 소자는 한승수(전대통령
비서실장)의 부인, 3녀 정자는 유연상 전 영남대 이사장의부인, 4녀 지
자는 남부컨트리클럽 회장 정영삼의 부인, 5녀 재희는 전 대한선주 회장
윤석민의 부인이 된다.
육영수는 1942년말 만주 신경(지금 장춘)에 살고 있던 큰 언니 육인
순의 집에 갔다가 돌아올 때 세 살배기 정자를 안고 와서 키웠다. 언니
가 지자를 낳은 뒤의 산후 조리를 도와 주러 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육
영수는 정자를 자신의 방에서 데리고 자고 옷도 해 입히면서 친딸처럼
키웠다. 홍정자는 나중에 청와대에서 이모의 개인비서가 된다. 육영수도
박정희처럼 교사로 1년반을 재직했다. 1945년10월 중학교 과정인 옥천공
립여자 전수학교의 가사 담당 교사가 된 것이다. 이 학교의 서무과장 송
재만은 육영수와 이종육촌간이었는데 육종관의 허락을 받고 육영수를 교
사로 추천했던 것이다. 교실 4개, 교사 13명, 학생수 1백30명의 학교였
다. 육영수가 교사를 그만둔 것은 남자교사들이 던진 농담에 마음이 상
했기 때문이었다. 육영수가 나오지 않자 교장이 사람을 보내 달래고 사
과도 했지만 독한 구석이 있는 그녀는 "글쎄 내가 안나가면 아무 일도
없게 되는 것 아녜요"라면서 요지부동이었다. 다시 '교동의 작은 아씨'
로 돌아온 육영수는 춘천에 돌아와서 살고 있던 언니 육인순의 집에 자
주들렀다. 육인순의 차녀 홍소자(홍소자)가 기억하는 이모의 모습--.
"이모가 놀러오면 온 식구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안
분위기가 환해지는 거예요. 생글생글 웃으며 조용조용하게 말하는데 사
근사근 잔잔한 시냇물 같았어요. '워쩜 좋으니…그려…그려…난 그렇게
하는 게 좋아'. 이런 식으로 충청도 사투리로 표정을 지어가면서 말하면
저는 이모가 너무 좋아서 어떤 때는 그런 이모와 내가 함께 손잡고 걷고
있는 게 사실인가 하고 한번 더 얼굴을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강원도 소방청장이던 형부 홍순일의 옆집에 살던 부인이 육영수를 보
더니 반했다. 강원도청의 간부로 근무하던 남동생을 육영수에게 소개했
다. 육영수의 동생 예수 할머니에 따르면 "언니는 한번 만난 뒤 별로 적
극적인 의사 표시가 없었다"고 한다. 육종관도 "두고 보자"고 시간을 끄
는데 남자 쪽에서 서울 명륜동에 기와집까지 사두었고 식모도 데려놓았
으니 빨리 식을 올리자고 서둘렀다고 한다. 이 혼담이 오고갈 때 6·25
가 터지고 육영수와 큰 언니의 장남 홍세표는 피난의 선발대가 되어 부
산영도로 내려갔다. 훗날 청와대 안주인 시절 육영수는 이런 글을 남겼
다.
〈부산이란 곳은 난생 처음이요,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곳
이었다. 혼자서 이곳저곳을 헤매다니다 방이라도 얻고 보니 말로만 듣던
영도섬이었다. 뒤늦게 남하하시겠다던 부모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영도에
서 막연하게 찾아 헤매며 애타는 초조감과 긴박감 속에서 오로지 국군의
승리만을 기도하며 불안에 싸여 있던 그때, 다리 아래로 푸른 바다를 내
려다 보고만 있던 나에게 '인내'라는 두 글자가 새로워졌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