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스미시(Alan Smithee)라는 감독이 있다. 67년 '건파이터의 죽
음(Death Of A Gunfighter)'으로 데뷔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30년
동안 30개 넘게 B급 공포영화나 저질 코미디를 만들었다.
기실 그는 제작자-감독 사이 숙명적 갈등이 낳은 유령인물이다. 영
화를 만들자면 감독이 제작자 간섭탓에 재량껏 일하지 못하는 예가 흔
하다. 이를테면 상업성과 작품성의 충돌이다. 제작자가 난도질한 영화
를 두고 감독이 "이건 내 작품이 아니다, 크레디트에서 내 이름을 빼
달라"고 요구할 때 쓰는 익명이 앨런 스미시다. 우리 '홍길동'처럼 쓰
는 '존 도(John Doe)'의 영화식 통칭이자, 감독이 행사하는 마지막 권
리인셈이다. 왜 이런 이름이 생겼는지는 분명치않다. 50년대 TV드라마
연출자로 앨런 스미시가 실재했다는 설도 있다.
한 달전쯤 '앨런 스미시 필름;번 할리우드 번(Burn Hollywood Burn)'
이라는 영화가 나왔다. '원초적 본능'을 쓴 조 에스터하스가 각본을
쓰고 제작했다. 앨런 스미시를 이름으로 써야 하는 감독 이야기를 통
해 할리우드 치부를 드러내는 풍자극이다. 현실과 허구는 뒤섞이는 것
인지. 이 영화를 연출한 아더 힐러는 에스터하스가 22분 분량을 맘대로 잘라버리자, 감독 이름을 앨런 스미시로 내세웠다. ( 오태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