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박재옥 ##.
박정희 대위가 여덟 살 아래인 이화여대 1학년생 이현란과 사귀면서
본처 김호남의 소외는 더욱 깊어졌다. 이런 사정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이 열한 살의 큰딸 재옥이었다.
'내 가슴 속에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이 충격으로 자리잡았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 엄마가 최고인데…
예쁘고 날씬하고 나에게도 그렇게 잘해주는데. 그 뒤로는 어머니가 어
디 가신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불안해졌다. 이
혼하기 전부터 이미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어머
니와 나의 애처로운 모습에 할머니는 얼마나 속을 끓이셨는지 모른다.
아들을 대놓고 나무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어머니를 마냥 잡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할머니 입장이었다. '불쌍한 내 새끼. 사촌형제들 사
이에서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 할머니는 축 처진 내 모습을 볼 때
마다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 하셨다. 할머니의 속바지 주머니에는 늘
무언가 먹을 것이 들어 있었다. 사촌들이 볼세라 내 입에 슬쩍 넣어주
시곤했다. 감이 하나 있으면 할머니는 화로의 재속에 파묻어두었다가
내가 혼자 방에 들어가면 재를 걷고서 뜨뜻해진 감을 꺼내주시는 것이
었다.'.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는 그때 일흔을 넘긴 나이였다. 늘 막내 며
느리의 음식솜씨와 바느질이 최고라고 칭찬했지만 김호남에게는 큰위로
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재옥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다섯 살때까지 젖을 먹었다. 남편의 사랑을 잃은 김호남의 딸에 대한
집착, 그런 어머니에 대한 딸의 집착도 그만큼 강했다. 김호남은 이윽
고 박재옥을 데리고 구미를 떠버렸다. 죽은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에게
만 이야기하고 사라져 버렸다. 백남의 할머니는 며느리와 손녀를 찾아
헤맸으나 알 길이 없었다. 박재옥에 따르면 모녀는 대구로 갔다고 한다.
'대구로 가보니 어머니에게도 이미 다른 남자가 있었다. 나이에 비
해서 조숙하고 눈치가 빠른 나는 대번에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상황이 싫었다. 결사적으로 그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반기를 들었다. 열살 남짓한 계집아이가 할 수 있는 거부
의 표시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어떤 조리 있는 말로 어머니를 설
득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울었다.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것
이 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1948년 조선경비사관하교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이현란과 약혼한
박정희 대위는 곧 이현란을 용산의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하기 시작
한다. 이현란의 생전증언에 따르면 여름방학 때는 대학 기숙사를 비워
주어야 하는데 마땅히 머물 곳도 없어 친구와 함께 박정희의 관사를 쓰
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온다는 친구는 나타나지 않아 혼자 쓰고
있는데 한 20일이 지나 박정희가 관사로 들어왔다. 박정희가 자신을
'계획적으로 관사에 오게끔 했다'는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이현란
은 이 관사를 나와 친구 집으로 옮겼는데 "명동에 칼국수를 먹으러 갔
다가(박정희에게)들켜서 다시 관사로 잡혀왔다"고 한다.
"맨날 피했다가 들켜서 다시 관사로 오곤 했습니다. 그분은 신사
였습니다. 내가 나이가 어린데도 '식사하쇼'라면서 존대를 했습니다.
인격있고 무게 있고 말이 없고… '내가 말이 없어 재미 없지요'라고 하
기에 '말이 핀꽃에 열매가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미스터 박은 술은
노상 마셔도 정신은 항상 말짱했어요. 자세가 흩어지지 않고요. 내가
술을 싫어하니까 집에서는 안마셨어요. 술 한 상이라도 우리 집에서 받
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누가 오기만 하면 벽장에 숨어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서로 다칠까봐 했던 때이니까요. 그분은
일본교육을 받은 탓에 독한 사람이었지만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여자의 기분을 맞추어 주는 데 철두철미했어요. 그 이상 다정다감할 수
가 없었습니다.".
이때 박정희는 이현란 몰래 사라진 김호남과의 이혼수속을 하려고
애를 태우고 있었다. 김호남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을 거절하고
어디론가 가버린 데다가 김호남의 아버지도 딸을 대신하여 도장을 찍어
주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있으
면서 한편으로는 좌익에 빠져들고 다른 편으로는 이현란이란 미인을 만
나 난생 처음으로 연애를 체험하고 있던 1948년 여름 뭉게구름이 모여
들더니 폭풍으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그해 8월17일 윤희중외 2백18명
의 7기 특별반 사관후보생들이 입교했다. 이들은 거의가 일제시대에 군
간부로 근무하였던 경력자들. 일본 육사58기 출신인 정래혁(육군중장
예편·국방장관과 민정당 대표 역임), 박정희의 만주군관 학교 동기 이
주일(감사원장 역임)도 이때 들어왔다. 8월20일 이들 생도는 완전무장
을 하고 태릉 학교 근처의 산을 돌아오는 10㎞의 구보를 했다. 여기서
민영식 서청하 생도가 일사병으로 죽었다. 그해 8월1일로 소령으로 승
진하였던 박정희 중대장은 사고의 책임을 지고 직위해제되고 말았다.
이 무렵 만주군관학교 1기 선배인 이기건이 월남하여 박정희를 찾
아왔다. 그는 광복 후 북한에서 인민군이 창설되자 장교로 입대하였다
가 공산주의가 체질에 맞지 않아 남한으로 탈출했었다.
"서울에 와서 친구들을 만나보니 최남근과 박정희가 남로당에 들어
갔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가 있었습니다. 박정희를 만나서 북한의 실정
을 이야기해주고 손을 씻으라고 했지만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최남근을 만나서 손을 떼라고 했더니 '여보, 나는 하는 일이 없소'라고
잡아떼더군요. 내가 '이런 충고도 마지막이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
이튿날인가 박정희 소령이 나를 당시 경복고 앞에 있던 어떤 집으로 데
리고 갔습니다. 강창선(당시 사관학교 중대장·숙군 때 사형) 조병건
(사관학교 중대장 출신·숙군 때 사형), 그리고 이재복(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술을 많이 마셨는데 이재복이 나에게
말을 시키는 것이, 내가 북한 공산당으로부터 무슨 밀명을 받아서 내려
온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겁이 나서 변소에 가는
척하고는 맨발로 달아났습니다.".(계속).
(조갑제 출판국 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