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경무대를 포격한다면" ##.

모포에 둘둘 말려 피투성이인 채로 여동생 집으로 업혀들어온 박상희
는 숨이 붙어 있었다. 여동생 박재희는 "당시 오빠가 가슴과 옆구리에
세발을 맞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제가 녹두물을 달여서 떠먹이는데 한 모금 마시고는 곧 숨이 넘어갔
습니다.".

2년 전 작고한 박재희 할머니는 "오빠 가족은 피신해서 임종을 못했
다"고 증언했다.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이 유복자 박준홍에게 들려준 이
야기는 다르다. 임종을 했고 남편이 숨을 거두면서 "내가왜 죽어. 내 뒤
는 있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조귀분은 딸 넷을
낳은 뒤 박준홍을 임신하고 있었다. 친척들 사이에서 '대통령감'으로 일
컬어졌던 박상희가 죽을 때 나이는 42세였다.

구미국민학교 교사로서 구미폭동 때 줄곧 박상희를 따라다녔던 송재
욱(72)의 증언에 따르면 구미에서는 좌익폭도들에 의한 인명피해는 한사
람도 없었다. 충북경찰이 마을로 진입하면서 박상희와 함께 달아나던 김
광암 군농조위원장, 장달수 민청 간부가 사살되고 6∼7명의 비무장한 주
민들도 사망했다. 경찰에 의한 공개총살은 없었다.

구미를 장악한 경찰은 그날부터 폭도들을 붙잡아들여 분류하는 일에
착수했다. 송재욱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폭도들에 의하여 구금되었던
덕분에 '양민'으로 분류되었다. '양민1호'란 완장을 차고서 그는 경찰서
연병장에 붙들려 와 있는 수백명 가운데서 '양민'을 골라내는 임무를 부
여받았다.

양손을 깍지낀 채 머리 위로 올리고 엎드려 있는 사람들 사이를 다니
면 애절한 눈짓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가 "일어나"하면 그 사람은 당일
로 석방이었다. 송재욱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구해내려고 종
일 왔다갔다 했다.

5일장으로 치러진 박상희의 장례식은 그의 생전 위상에 비교하면 쓸
쓸한 편이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한밤중에 몰래 문상을 다녀가곤
했다. 구미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박상희의 원만한 인격으로 해서 희생자
가 적었다고 말하고 있다. 박상희의 큰딸 영옥은 구미국민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아버지의 사망 후 해직을 시키라는 압력이 내려왔으나 배영도
교장이 이웃한 고아국민학교로 전출시키는 것으로 수습했다고 한다.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박정희가 형의 죽음을 어떻
게 들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장례식에 참석하지는 못했고, 그 며칠 뒤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올라갔다고 한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 가족
들에게 "내가 그때 형의 죽음에 대하여 알아보러 다녔다고 해서 나중에
김창룡으로부터 추궁을 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박준홍에게
"형님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사람이 좋고 여러 사람들이 따르다가
보니까 그 사건에 휩쓸려 든 것이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박정희가 마음속으로 어렵게도 고맙게도 생각하면서 존경했던 박상희
의 비극적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때까지 박정희는 사상문
제에 있어서는 방관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여운형의 중도좌파 노
선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하면서도 공산당식 행태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
감을 가지고 있었다. 형의 죽음은 그러한 박정희를 왼쪽으로 확 밀어버
리는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형의 죽음을 가져온 우익경찰과 그 배후인
미군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박정희는 장교가 된 뒤에는 미군들
과 부딪치면서 그런 증오심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에게는 미군
이 일제를 대체한 또 다른 외세에 지나지 않았다. 심정적으로 왼쪽으로
기운 그를 공산당 조직으로 엮어버린 것은 박상희의 친구들과 만군출신
좌익인맥이었다.

박정희의 달라진 모습에 대한 1차적인 증언자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의 동기생 이한림이다. 박정희가 생도일 때 이한림 부위는 사관학교
의행정부장이었다. 만주군관 동기생 이병주 부위는 1연대 중대장이었는
데 1연대는 경비사관학교 내에 주둔했다. 만주군관 동기생 세 사람은 자
연히 자주 어울려 다녔다. 이병주는 이한림을 따라서 명동성당에 미사를
보러 나가곤 했다. 어느 날 이병주가 이한림에게 육사의숲속을 같이 산
책하자고 했다. 함께 걸으면서 이병주는 무신론과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유도해갔다. 그동안 성당에 따라다닌 것은 "이한림 너
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였다"면서 "죽은 예수에 대한 제사인 미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한림은 우정을 생각하여듣기만
했다. 박정희가 생도로 들어온 뒤에는 3자대화에서 이병주와 박정희가
합세하여 이한림을 설득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병주가 말하는 요지는,
남한은 부패하고 혼란하여 민족통일을 이룰 수 없고 북한에 오히려 희망
이 있다는 것이었다. 10월 어느 날 명동 입구에 있던 제1호텔 다방에서
박정희는 먼저 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한림이 먼저 왔다. 박
정희는 이한림이 앉자마자 정치와 사상문제를 꺼내는 것이었다. 이한림
이 시큰둥하게 앉아 있으니 박정희는 '이병주 칭찬'으로 말머리를 돌렸
다.

"병주는 지난 날 오하의 아몽이 아니야."(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로
서 오나라의 여몽이 공부를 많이 하여 사람이 달라진 것을 노숙이 감탄
하여 한 말이다) 이한림은 박정희와 이병주가 작당하여 자신을 사상적으
로 세뇌시키려 한다고 판단했다. 이 부위는 한 마디를 던지고 일어났다.

"너희가 사상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대화로써 나를 세뇌시키려고 한다
면 앞으로 안 만나겠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도 박정희는 이한림과 자주 만났다. 하루는 두
사람이 남산으로 산책을 가서 중앙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자 불쑥
입을 열었다.

"한림이. 이곳에 포를 설치하고 저 경무대(현재의 청와대. 당시엔 하
지 미군사령관의 숙소)쪽을 포격하면 나폴레옹이 소요 진압사령관으로서
파리를 제압했던 것과 같이 경무대 장악은 문제 없겠지?".

"정희야. 그런 농담 하지마. 너는 농담이 지나칠 때가 있어.".

이한림은 박정희의 농담같은 진담을 막았다.(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