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8장 한 작은 종말 ⑭ ##.
한동안 말없이 언덕길을 오르던 정숙이 산중턱 한곳을 가리켰다. 초라
한 판자집 동네와 한참 떨어진 고급 주택가였는데, 그 한편 높은 축대 위
에 푸른 지붕의 커다란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최신의 공법으로 한껏 멋부
려 지은 집이었다.
"저집 저래봬도 굉장한 집이다. 원래 ○○재벌 큰사위 집으로 지었대.
그런데 뭐가 맞지 않아 내놓은걸 걔네 아버지가 사들인거야."
"걔네 아버지는 뭘하는데?".
"일제 가전제품 한국총판. 요즘은 좀 그렇지만 몇년전만 해도 대단했
던 가봐. 그때 번 돈으로 큰 공장을 지었을 정도니까."
"전형적인 매판자본이군.".
무엇 때문인가 기분이 뒤틀어진 인철이 그렇게 확실하지도 않은 혐의
를 씌우자 정숙이 다시 발끈했다.
"자꾸 그러지마. 이따가 너두 보겠지만 걔네 아버지 매너 좋은 신사
야.어디서 어디까지를 매판으로 봐야할지 모르지만 저만큼 되기 위해 노
력도 할 만큼 한 모양이구.".
쏘아부치듯 말했지만 그녀도 더는 인철의 심사를 건들 마음은 없어
보였다. 인철이 무어라고 받기도 전에 다시 풀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 혹시 저기 가고 싶지 않으면 그렇다고 말해. 지금이라도 전화해주
고 안가면 돼."
"실은 왠지 자신이 없네. 아무래도 나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인철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한동안 말가니 인철을 바
라보더니 억지스런 웃음과 함께 달랬다.
"때로 난 토옹 알 수가 없더라. 너란 사람- 그 도도한 자존심은 어디
가고 그렇게 자신없어져? 네가 어디가 어떻게 모자라 걔네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그건 지나친 자의식이야. 네가 정말로 걔네들과 어울리
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내가 널 데려가지 않아. 나도 걔네들에게 너 때문
에 무시당하기는 싫거든. 그런데- 난 지금 너를 자랑하려고 데려가는 중
이란 말이야.".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인철의 마음은 종내 풀리
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이미 그날의 비극적인 결말이 어떤 예감으로
인철에게 와닿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의 이십분 가까이 걸어 그 집 대문앞에 이르렀을 때 인철은 다시
한번 자신도 모를 위축을 경험했다. 한길은 될성싶은 축대 사이에 세워
진철문의 위용 때문이었다. 굵은 쇠창살에 품위있는 조각주물 장식을 입
혀둔 것인데 영화에서 본 외국의 대저택 철문 그대로였다.
정숙이 초인종을 누르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또래의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정숙이 자신을 밝히자 이번에도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 옆의 쪽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