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 '라 붐'으로 세상에 나섰을 때 소피 마르소는 예쁘기만 한
열세살 소녀였다. 이제 그는 출산까지 경험하며 어엿한 여인이 됐
다. 21일 개봉하는 '파이어 라이트'에서 소피 마르소는 절제된 표
정과 코발트빛 눈동자로 '나도 숨이 긴 배우'라고 자처한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풀어가는 이 할리우드판 '씨받이' 이야기
에서 중심 이미지는 벽난로다. 식물인간 아내를 둔 지주(스티븐 딜
레인)가 후대를 이어줄 대리모(소피 마르소)를 사서 사흘밤을 지낸
다. 첫날밤 서먹한 남자는 뇐다. "벽난로 불빛(파이어 라이트)이
생각보다 밝군." 여자는 딸을 낳아 곧장 빼앗긴다. 남자가 이름조
차 알려주지 않았지만, 7년 수소문끝에 여자는 남자 집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숨소리로 감정을 전달할 만큼 대사는 시종 낮은 톤으로 깔리고
화면은 무채색이다. 그 속에서 벽난로만 애정 격랑을 상징하며 붉
게 탄다. 롤러코스터처럼 쉴 새 없이 자극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파이어라이트'는 드물게 차분한 멜로드라마다. 요즘 한국 멜로들
이 잇따라 홈런을 날리듯, 스산한 시절 특히 여자 관객들을 끌 법
하다.

그렇다고 내처 눈물만 뽑아내지는 않는다. 임권택 감독 '씨받이'
는 운명에 순응하는 여자의 한을 그렸다. 반면 '파이어 라이트'에
서 여자는 다부지게 장애물들을 제치고 남자와 딸을 쟁취한다. 세
사람이 마차를 타고 저택을 떠나는 라스트를 카메라는 크레인 샷으
로 내려다보며 축복한다.

하지만 영화를 읽어 즐기려는 이들에겐 아쉬움이 적지않다. 스
토리가 단선적인 데다 주변인물 묘사가 부실한 탓에 다소 지루하다.
소피마르소를 제외한 인물들에게는 감정을 이입하기 힘들다. 가끔
씩 느닷없고 설득력 없는 상황변화를 뛰어넘어야 한다. '섀도 랜드'
와 '넬'을 쓴 윌리엄 니콜슨의 감독 데뷔작이지만 이번 시나리오는
범작이다. 겨울바다, 호수, 눈 내리는 고택들이 이어내는 볼거리에,
크리스터퍼 거닝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선율이 잘 어울렸다.

( 오태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