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21일 개봉)은 홍콩감독 갈민휘의 데뷔작이다. 한국팬들에
겐 이 생소한 감독보다 제작자 이름이 먼저 눈에 띈다. 국내 마니아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있는 왕가위가 제작한 첫 작품이기 때문
이다. '첫사랑'엔 왕가위 체취가 가득 묻어난다. 골수팬이라면 곳곳
에서 숨은 그림찾기처럼 왕가위의 흔적을 발견하는 재미를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갈민휘는 왕가위보다 훨씬 가볍고 과격하다.

'첫사랑'은 몽유병 소녀를 사랑하는 남자와, 배신한 옛 연인을 10
년만에 찾아가는 여자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스토리는 전혀 중요하
지 않다. 갈민휘가 연출 제의를 받고 횡설수설하며 영화를 찍어나가는
이른바 '메이킹 필름' 형식을 띠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영화만들기에 관한 끝없는 농담이다. 현란한 영상에 덧
붙여 개그맨이나 변사처럼 너스레 떨며 해설해대는 갈민휘의 원맨쇼다.
감독의 요란한 자의식 앞에서 금성무나 막문위같은 출연 배우는 소품
에 불과하다. 여기에 촬영감독 크리스터퍼 도일은 떠들썩한 게릴라적
촬영술로 카메라와 관객을 어지럽게 놀려댄다.

영화 마지막에서 갈민휘는 장난기를 버리고 영화에 대한 '첫사랑'
을 고백한다. 데뷔작을 만들며 얼마나 힘들었는지, 영화를 얼마나 사
랑하는지 말하며 눈물까지 흘린다. 이 대목에는 상당한 울림이 있다.
하지만 농담이 지나치게 길었고 장난은 너무 과격했다. 관객은 짤막하
고 수줍은 영화사랑을 듣느라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제작
진은 턱없이 많은 제작비를 들인 셈이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영화실험만이 가득한 '첫사랑'은 굳이
러닝타임 1시간38분에 담을 필요가 없었다. 마치 왕가위가 연출한 것
처럼 애매하게 '왕가위 작품'으로 표기해 광고하는 수입사 홍보방식에
도 눈살이 찌푸러진다. ( 이동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