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
어진다"고 선언한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하지만 역사는 성적 제약을
훌쩍 뛰어넘어 세계사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수많은 여성들을 기
억하고 있다.
미국 여성작가 데보라 펠더가 펴낸 '세계사를 바꾼 여성들(원제는 The
100 Most Influential Women Of All Time)'(에디터간)은 바로 그런 여성
들의 간략한 전기와 인물평을 모은 책이다.
실린 인물은 기원전 그리스 여성시인 사포부터 '현대의 성녀' 마더 테
레사까지 망라한 1백명. 인권운동가 사상가 과학자 교육자 예술가 체육인
등 다양하다. 저자는 "인류 역사-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고, 감동적 삶을
산 여성을 골랐다"고 밝힌다. 미국 여성학자들에게 설문조사해 선정하고
등수를 매겼다.
첫 자리에는 '금세기의 가장 자유로운 미국 여성'으로 불리는 엘리너
루스벨트를 놓았다. 평생토록 여성노동자, 흑인, 극빈자에 헌신한 공로다.
남편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군성 차관 시절 여비서와 스캔들을 빚었다. 저
자는 "그 충격과 실망을 딛고, 오히려 독립적 삶을 살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투쟁했기에 더욱 위대하다"고 말한다.
작지만 의미있는 행동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여성도 있다. 버스
좌석에 흑백인석을 따로 두었던 1955년 미국, 흑인재봉사 로자 파크스는
좌석을 비워달라는 백인의 요구를 조용히 "싫다"고 거부했다. '파크스 사
건'은 결국 흑인인권운동에 불을 붙이는 단초가 됐고, 마틴 루터 킹 목사
신화를 탄생시켰다.
1910년대 미국에서 금기시되던 산아제한과 피임 합법화투쟁을 벌여 여
성의 신체해방을 쟁취한 마가렛 생어,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컴퓨터언어
개척자 그레이스 호퍼, '저널리즘의 퍼스트레이디' 도로시 톰슨, 흑인성
악가 마리아 앤더슨, 배우 루실 볼 등도 소개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인물이 서양, 그중에도 미국에 치우치는 한계를 벗
어나지 못했다. 저자가 매긴 순위도 논란거리가 될 만하다. 그러나 이런
한계만 미리 염두에 둔다면, 시대와 환경의 제약을 딛고 치열한 삶을 살
아낸 여성 1백명을 만나는 일은 충분히 즐겁다. ( 권혁종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