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낮 12시30분쯤(현지시각) 워싱턴
시내의 두 장소에서는 미국의 역사를 바꾸게 될 지도 모르는 중요한 사
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백악관으로부터 두 블럭 쯤 떨어진 워싱턴의 유
명 변호사 로버트 베넷의 11층사무실 옆 휴게실에서는 클린턴 미국대통
령등이 지친 표정으로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이날 클린턴은
현직 미국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직무와 관계되지 않는 민사 사건의
피고인 심문에 응하고 있었다. 오전 10시30분쯤부터 시작, 약 6시간 진
행된 심문에서 클린턴은 여러가지 고백을 털어놓고 있었다.
6년전인 92년 1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으면서' 빠져나갔던 전
아칸소주 밤무대 가수 출신의 제니퍼 플라워스와의 혼외정사 사실을 드
디어 인정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클린턴은 자신을 고소한 폴라 존스의
오럴섹스 강요 등 성희롱 주장에 대해서는 "존스양을 기억하지 못한다"
는 말로 빠져나갔지만, 전직 주경비대원들이 존스양과의 만남을 주선했
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는 말로 어쩔 수 없
이 일부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클린턴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 아무도 모를 것으로 생각했던 전백악관 인턴 여직원 모
니카 르윈스키(24)와의 성관계여부에 관해 존스양측으로부터 질문이 있
었던 것이다. 클린턴은 이를 부인했지만, 르윈스키에게 "선물을 건네준
적은 있다"라고 증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시각 미국의 대표적 시사주간지 중의 하나인 뉴스위크지의 편
집국은 폭풍 전야나 다름없었다. 클린턴 스캔들 취재에 관한한 타의 추
종을 불허하는 마이클 이시코프가 취재해온 엄청난 사건 때문이었다.클
린턴이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믿고 싶어했던 르윈스키의 육성까지 담긴
90분짜리 녹음 테이프까지 확보한 이시코프는 ▲클린턴이 95년 당시 21
세에 불과한 인턴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고 ▲그녀가 폴라 존스양으로부
터 참고인 진술을 요구받자 클린턴과 측근인 버논 조던 변호사와 함께
위증을 교사했다는 줄거리의 기사였다. 사흘전인 14일 케네스 스타 특
별검사가 이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는 낌새를 포착한 이시코프의 취재
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특별검사측은 기사 게재를 미뤄줄 것을 요청했다. 수사에 지
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스타 검사측이 르윈스키와 클린턴간의
성관계와 위증 강요 여부에 대한 혐의를 포착한 것은 12일. 르윈스키의
친구였던 전직 백악관비서 출신의 린다 트립이 스스로 녹음한 테이프들
을 들고 연락해 왔던 것. 특별검사팀은 14일로 예정된 트립과 르윈스키
간의 만남을 위해 트립의 몸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
이날 르윈스키는
트립에게 중대한 메모 하나를 건넸다. 앞으로 폴라 존스 등으로부터 참
고인 증언요청이 있을 때마다 클린턴과 자신에 관한 부분을 '모르는 체
해달라'는,분명 전문가가 만들어줬을 것이 틀림없는 '대화 포인트'였던
것이다.
16일 특별검사팀은 트립에게 르윈스키와 다시 만날 것을 요청했
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연방수사국(FBI) 요원들과 특별검
사팀 수사관들은 르윈스키에게 버논 조던,더 나아가서는 클린턴과 도청
장치를 한 만남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날 르윈스키집에서 클
린턴이 준 선물은 물론 그녀의 노트북 컴퓨터까지 압수했다.
뉴스위크는 결국 기사 게재를 미루기로 했다. 대통령의 탄핵으로까
지 이어질 지도 모르는 엄청난 사안에서, 단지 24세의 르윈스키라는 여
성이 친구에게 한 이야기만을 가지고 기사를 쓰기는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94년 워싱턴포스트지에 근무할 때도 폴라 존스양 이야기의
게재가 늦춰지면서 특종을 놓치고, 이에 대한 항의 과정에서 회사를 그
만두기까지 했던 이시코프기자도 어쩔 수 없이 뉴스위크지 간부들의 결
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뉴스위크의 결정이 내려진 다음날인 18일 워싱턴 주변의 가십 전문
칼럼니스트인 매트 드러지는 어디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이 이야기를
인터넷에 띄웠다. 또 보수 논객으로 명망이 높은 윌리엄 크리스톨이 일
요일인 이날 ABC방송의 '디스 위크' 프로그램에서 이를 주장했지만, 동
료들이 말문을 막는 바람에 끝까지 다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클린턴과 르윈스키간의 섹스 스캔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
다. 결국 워싱턴포스트지와 ABC 방송이 화요일인 20일 저녁 다음 날짜
신문과 방송에 이를 특종 보도하면서, 미국 전역이 이른바 '지퍼게이트
(Zippergate)'의 열풍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워싱턴=박두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