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진 눈초리에 우스꽝스런 얼굴, 곰살궂은 목소리. 윤문식(55)은
'섭섭하게 생긴 얼굴'을 자처한다. 말쑥한 양복보다는 핫바지나 군밤
장수 모자가 제격이다. 그의 진가는 마당놀이와 악극에서 드러난다.
재기넘치는 입심으로 관객을 뒤흔들고 걸쭉한 사설과 몸짓으로 신
명을 돋운다. 그가 없는 마당놀이는 고춧가루없는 김치를 먹는 것같다
고 할까. 그는 '광대' 전문이다. 81년 극단 미추에서 시작한 마당놀
이에서 줄곧 방자 아니면 마당쇠였다. 최고 '직함'이라야 이방쯤이다.
8편이나 출연한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도 모두 광대였다. 93년 극단
가교가 막을 연 악극에서도 그는 감초 조연이다. 신파조 대사와 구슬픈
트롯 가요로 '맛'을 더했다. 생리적으로 그는 심각한 연극을 혐오한다.
소리 지르고 길길이 뛰어다니는 광대가 체질에 맞다.
소리장도. 웃음속에 칼을 품었다는 고사성어를 좋아한다.
"주인공들이 이야기하지 못한 부분을 꼬집고 웃기는 게 광대"라고
그는 광대 철학을 말한다. 그는 충남 서산에서 7남매중 넷째로 태어나
일곱살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먹고 살려고 시장으로 나섰다.
한량이던 아버지 기질을 물려받았던지 고교시절 학예회 연극이 교장선생
눈에 들었다.
"서울에는 배우 전문 대학이 몇 곳 있으니 그쪽으로 진학해보지"
하고 권했다.
어머니는 달랐다. "파평 윤씨 집안에 웬 광대냐"며 결사반대였다.
무작정 집을 나서 동두천 미군부대 이발소와 하우스보이를 전전하
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그는 68년 중앙대 동창들이 만든 극
단 가교로 연극계에 발을 내디뎠다.
최주봉 박인환 등 동기들과 콤비였다. 미국 선교단체 도움으로
교도소와 낙도로 위문공연을 다녔다. 전국을 세 차례나 돌며 고생도 숱
하게 했다. 드물게 여유가 생겨 삼겹살이라도 구울라치면 고기를 상추
에 숨겨놓거나 젓가락으로 눌러둬야 차례가 돌아왔다.
이 시기 그는 '방화범' 같은 번역극을 많이 했다.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75년 우리 소리와 몸짓에 주력하던 극단 민예로 옮겼다. 판소리
와 탈춤을 배웠다. 마당극 '놀부전'을 비롯해 여러 작품을 했다.
자리를 잡은 것은 81년 국립극단에 입단하면서였다. 김성녀와 단
짝을 이룬 적이 많아 부부로 착각하는 관객들도 많았다. 96년엔 최인훈
이 쓰고 손진책이 연출한 '봄이 오면 산에들에'로 서울연극제 연기상을
탔다.
30년 무대인생에서 처음 받은 연기상. '달래' 아비 말더듬이 역이
었다. 대사 없이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연기해야 했다. 그는 "적성에 맞지
않아 무척 고생했다"면서도 내심 흐뭇하더라고했다.
그는 2월중에 올릴 악극 '눈물젖은 두만강'(김상열 작-연출)에서
독립운동가인 주인공의 아버지 역을 맡았다. 사뭇 심각한 역이다. 하지
만 그는 "평생 광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김기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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