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⑮ "아노네, 보이소" ##.
언론인 출신 청와대 공보비서관 김종신이 쓴 '박정희 대통령 농민의
아들이 대통령이 되기까지'란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상모리는 겨울에는 유난히 추웠습니다. 들판이 트인 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흐르고 있는데, 그 강바람이 대단했습니다. 모래바람이 불 때는
눈을 뜨기조차 어려웠고, 눈보라는 살점을 에는 듯했습니다. 어머니는
두껍게 솜을 드린 바지저고리에다 목에는 목수건을 감아 얼굴까지 덮게
하고, 귀에는 귀막이까지 하고 눈만 빠꼼히 나오게 여며 주셨습니다.'.
기자는 소년 박정희의 활동공간이었던 통학길과 상모동 주변을 느껴
보려고 겨울에 맞추어 답사를 했다. 대문을 제외하고는 산자락으로 빙
둘러싸인 박정희 생가는 울타리가 없는 대신 대나무와 탱자나무숲에 포
위되어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대나무와 탱자나무들은 박정희의 키를
닮았는지 그다지 크지 않다. 생가 부근에는 큰 나무가 없다. 박정희가
어머니 손길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새벽밥을 먹고 나서던 삽작문 부근에
서 동리를 내려다 보면 멀리 낙동강이 아련하게 보인다. 지금은 앞을 가
로 막는 아파트가 들어서서 잘 볼 수 없지만 1920년대 그 무렵엔 낙동강
에서 피어오르던 자욱한 물안개가 흐릿하게 보였다고 한다.
아랫마을에서 이 집으로 도달하는 길은 구불거리는 소로와 논두렁 밭
두렁뿐이었다. 그 나머지 공간은 밭이기도 했고 논이기도 했으며, 혹은
잡풀들이 솟아난 벌판이기도 했다. 겨울이 되면 낙동강에서 불어 오는
찬바람은 마치 이 집을 향해 몰려드는 것처럼 매서웠다. 박정희의 집은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방향인 동쪽으로 대문이 나 있다.
생가로부터 5백여m 아래로 철로가 지나가고 있다. 1905년 5월28일 개
통된 경부선이다. 경부선은 1911년 11월1일 압록강 철교가 준공되자 남
만철도와 연결되어 북경까지 갈 수 있었다. 경부선은 원래는 구미를 지
나지 않았다. 칠곡군 약목에서 금릉군의 부상을 거쳐 김천으로 빠졌다.
박정희가 태어나기 한 해 전인 1916년에 금오산 우회철도공사가 완공되
면서 약목-구미-김천으로 노선이 변경되어 박정희의 집 앞을 지나게 되
었다. 이로써 구미역은 선산군 일대의 경제-문화적 관문이 되었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특급열차는 4대가 있었다. 하얼빈까지 가
는 '히카리(광)', '쓰바메(연)'와 북경(북경)까지 갔던 '노조미(희망)',
'다이리쿠(대륙)'가 그것이다. 생가에서 박정희의 어머니가 학교에 가는
막내를 뒤따라 나와 배웅하던 '청녕둑'이란 곳까지는 잰 걸음으로 10분
거리. 이곳은 현재 야트막한 언덕으로 변해 있지만 당시엔 나무가 많았
다. 청녕둑을 지나면 사곡동으로 이어진다. 박정희가 '나의 소년시절'
에서 '사곡동 뒤 솔밭길은 나무가 우거지고 가끔 늑대가 나와 혼자서는
다니지 못했던길'이라고 썼던 이곳은 현재 아스팔트와 시멘트 포장도로
가 가로지르고 도처에 주택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박정희가 새벽같이 학교로 걸어가야 했던 길은 철로변을 따라 구불구
불 이어진 논두렁과 소로였다. 소년 박정희는 상모동에서 출발해 사곡동,
광평동, 송정동을 가로질러 원평동의 구미역 부근까지 철로변을 따라 걸
어야 했다. 편도 8㎞라면 어른들의 보속으로 두 시간 거리다. 어린소년
이 매일 오전 8시에 시작하는 수업에 맞춰 집을 나서야 했으니 새벽 5시
가 조금 넘을 때 출발해야 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기자가 걸어 보았다. 아침에 어머니가 배웅하
던 청녕둑에 다다를 때까지는 산 구릉에 파묻힌 그의 집은 보이지 않는
다. 그 대신 밤하늘 아래로 검은 산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다. 박정희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에 맡추어 청녕둑 근처에서 해질 무렵의 서쪽 하늘
을 보면 금성과 수성이 빛을 발하고 있다. 해뜰 때나 해질 무렵이면 우
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별이지만 청녕둑 근처에서 보는 이 별은
유난히 밝다. 별이 뜨는 방향으로 검은 산 그림자가 드리워져 상대적으
로 별이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차길을 따라 약 1㎞쯤 걸어가면 철
길 아래로 흐르는 하천과 만난다. 금오산에서 시작되어 구미공단을 통과
해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이 하천은 현재 복개되어 콘크리트 틈 사이로
겨우 바닥을 볼 수 있다. 구미 보통학교 아이들은 이 철길 아래 모래사
장에서 자주 놀았다고 한다. 김재학(71·박정희 생가 보존회 회장)은 박
정희와 권해도의 씨름사건을 들려주었다.
"그분은 키가 작아 권군의 가슴에 찰 정도였지요. 그 날도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물장구도 치고 씨름도 하곤 했는데 박정희와 권해도가 한
판붙게 됐답니다. 권해도가 이겼지요. 그런데 박정희는 자신이 이길 때
까지 계속하겠다고 우겨 아이들도 끝까지 심판을 봐야 했다는 겁니다.
씨름은 해가지고 나서도 계속되는 바람에 권해도가 기권해버렸답니다.".
머리 속엔 이순신을, 가슴속엔 나폴레옹을 품고 다니던 말없는 학생
박정희는 승부에 대한 집요함을 벌써부터 키워가고 있었던 듯하다. 소년
은 노는 날이면 앞산에 올라 혼자서 목검놀이를 하든가 아니면 동네 아
이들을 모아놓고 전쟁놀이에 열중했다고 한다. 유아기의 정희에게 젖을
물려주었던 큰 누나 박귀희는 아들 은희만(61)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려 주었다고 한다.
"정희는 산에서 동네 아이들을 불러다 놓고 대장처럼 명령하곤 했단
다. 나무칼을 지휘봉처럼 휘두르면서 '저거 때려 부셔!'라고 소리치곤
했지.".
박정희가 군인을 동경하게 된 한 계기는 밀주단속을 하던 일본 순사
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김재학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일본 순사들이 밀주 단속하러 온다고 하면 정희네 식구는 집 안에
감춰두었던 술독을 대나무숲 속에 파묻는다고 야단이었지요. 그 시대에
구미면에 일본 순사가 세 명인가 있었는데 모두 무서워 했습니다. 그런
데 일본 순사가 상모리에 나타났을 때 마침 일본군인과 시비가 붙은 걸
박정희가 보았답니다. 제 아무리 일본 순사라 해도 군인들에게는 굽신거
릴수밖에 없었는데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지요. 박정희는 이 장면을 유
심히 보더니 '나도크면 군인이 되어야겠다'고 말했답니다.".
박정희는 권력을 지향하면서도 남용되는 권력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품고 있었던 사람이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런 반골의식을 버리지 못
했다. 이런 생각이 싹튼 것이 일본 순사와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그럴듯
해 보인다. 박정희가 다니던 구미 보통학교 바로 옆에 선산경찰서 주재
소(요사이의 파출소)가 있었고, 박정희의 큰형은 긍융조합에 돈을 갚지
않는다고 순사들이 잡으러 다니는 것을 피해서 만주로 달아났다. 뒤에
나오지만 셋째형 상희는 민족운동가로 분류되어 경찰서에 자주 불려가고
예비검속을 당하고 있었다. 소년은 순사의 권력을 가깝게 느끼면서 자랐
다. 구미 주재소에는 기타하라(북원)라는 순사부장이 있었다. 조선사람
들이 문패를 삐딱하게 달거나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불러서 혼을
내곤 했다. 한 유지가 '잘 봐달라'는 뜻에서 장닭을 선물했다. 일본
인 처가 일본식으로 닭을 잡는데 먼저 닭의 털을 뽑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던 닭이 털이 뽑혀 햐얀 살이 드러난 채로 후다닥 달아났다. 기타하
라의 처는 이곳저곳 골목을 누비면서 조선사람들을 보고는 이렇게 하소
연했다고 전한다.
"아노네, 보이소. 계라니노 아버지노, 저고리노 벗어하고 도망갔소,
못봤소?".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