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3장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 ⑧ ##.
주는 술잔을 비운 뒤에 인철은 다시 몇번이나 원래의 화제로 돌아가 보
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한형은 노련하게 말을 돌렸다. 그러다가 인철이
더참을 수 없다는 기분이 되었을 때에야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툭 던졌
다.
"그런데 말이요, 이형. 이형도 우리 문학회에 한번 나와보는게 어때요?
그동안 긴가민가해서 망설였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이형 역시 우
리동네 사람 같애.".
뒷날까지도 인철에게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충격적으로 들렸는지가 의문
이었다. 뭔가 모욕당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한 한몫 하는 존재로 인정받은
기분이 그대로 한 전율이 되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게 자신도 모
르게 목소리를 떨리게 했다.
"잘못… 보셨을 겁니다. 저는 별로…."
"아니, 그럴 리 없소. 이형의 발상법이나 어휘, 논리구조는 문학적 단
련을 받아도 아주 많이 받은 사람의 그것이오. 가만히 돌이켜 보시오. 정
말 이형은 한번도 글쓰기를 일생의 할일로 염두에 두어본 적이 없소?".
무슨 암시에라도 걸린듯 인철은 거기서 한동안 자신의 삶을 문학과 관
련해 돌아보았다. 자신이 매우 열정적인 독자라는 것은 쉽게 인정이 되었
다. 문학에 대해 남다른 가치를 부여했음도 시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
스로 시인이나 작가가 되는 꿈은 꾸어본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런 적은 없는 것같습니다."
"글쓰기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물론 글을 잘 써보려고 노력한 적은 있습니다. 어느 해인가는 일기장
끝에 매일 하나씩 사물에 관한 소묘를 붙이기도 했지요. 잉크, 백묵, 물
컵, 따위 평범한 주변 사물로… 하지만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학문을 하든 정치를 하든 종교를 하든 내가 내면에
심취한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비로서의 문장을 수련했을 뿐입
니다.".
"내가 느낀 게 바로 그거였군. 하지만 그것도 중요한 수련이요. 이제
그걸 문학의 장비로 활용해볼 생각은 없소?"
"글쎄요….".
그러다가 인철은 불현듯 지난 삶에서 자신이 문학에 품어보았던 단상들
을 기억해냈다. 어쩌면 내가 말과 글의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는 것이었
는데 그것은 언제나 한 부질없는 망상 혹은 불길한 예감 같은 것으로 머
리속을 잠시 스쳐 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스쳐간 자리에 남는 것
은 삶이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는 논리들이었다.
"그럼 이제 한번 해봅시다. 시도해봐야 될 때가 충분히 온 것같소. 무
언가를 써봐요. 다음주 토요일에 합평회가 있는데 그때 봅시다.".
한형은 한형대로 그 어떤 열정에 사로잡힌 것인지 막무가내로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그런데 알수 없는 것은 그런 한형에 대한 인철의 감정이
었다. 당황스럽고 난처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마음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마움이 앞섰다.
그날 집으로 돌아간 인철은 한형의 억지스런 권유를 무슨 뿌리칠수 없
는 강요로 여기며 난생 처음 문학적인 글쓰기로 한밤을 새웠다. 처음 그
가 생각한 장르는 그 양때문에 흔히 손쉬우리란 착각을 주는 시였다. 다
음은 그 형식 때문에 초심자를 유혹하기 쉬운 수필. 그러나 그가 일주일
에 걸쳐 완성한 것은 결국 단편소설이었다.
인철이 60매 남짓한 그 소설의 마지막 추고를 끝낸 것은 그날 새벽이었
다. 그동안 인철은 오직 그 소설만을 생각하며 밤낮을 보냈다. 그러나
그 새벽 그가 느낀 것은 자신이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만나고 있다
는 어떤 섬뜩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