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아, 당신을 앗아간 사신도 아름다움만은 앗아가지 못
했구나. 무지개 같은 아름다움이 입술에도 뺨에도 아직 남아있구나. 저
그림자같은 사신이 당신을 사랑해 이 어둠속에 가둔 것은 아닌지. 그것
이 마음에 걸려 나는 이 어두운 궁전을 떠나지 않겠노라." 로미오는 줄
리엣 시신을 끌어안고 미친듯 입을 맞추고는 독약을 마신다.

"어디 있어요, 나의 로미오. 이 잔은 무얼까? 독이로구나. 무심한
이여, 나를 위해 한모금 남겨놓지도 않고 다 마셔버리다니. 입을 맞추
겠어요. 아직 독이 남아있을 지도 몰라. 아, 아직도 따스한 그대 입술.
다행히 단검이 있구나. 나를 죽게해다오."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 줄리
엣은 단검을 가슴 깊이 꽂고 로미오 곁에 쓰러진다.

'로미오와 줄리엣'만큼 자주 리메이크된 셰익스피어 비극은 없다. 1908
년 마리오 카세리니 감독 작품부터 1996년 바즈 루어만 감독 작품까지
수십편이 스크린과 TV에서 반복됐다. 그중 가장 인기를 모은 작품은 프
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68년작이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10대 배우를 기
용해 실제 나이와 배역을 맞췄다.

이 작품에서 로미오(레너드 화이팅·당시 17세)는 잊었어도, 줄리엣
(올리비아 허시·당시 15세)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는 드물다. 아이처럼
맑은 눈동자와 윤기 넘치는 긴 생머리는 당시 청소년들 사진첩과 책받
침을 장식한 우상이었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자유로운 사랑을 갈망하
는 용기로 사슬이 풀리고…"로 시작하는 니노 로타의 주제가 'A Time For
Us'는 밤마다 FM을 타고 흘렀고, 셰익스피어 희곡을 읽어본 사람은 별
로 없어도 이 영화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바로 그때문에 제피렐리는 원작 대사의 '무단 삭제' 누명을 쓰고 평
단의 비난을 받았다. 첫 만남, 첫 키스가 이뤄지는 무도회에서 제피렐
리는 셰익스피어의 고결한 표현을 빌려 10대의 성적 갈망만 강조했다는
비난이다. "부드러운 당신 입술로 내 죄는 씻겼습니다." "그러면 당신
의 죄가 내 입술로 옮겨졌나요?" "죄가 옮겨지다니 이 무슨 즐거운 꾸
지람입니까? 내 죄를 제발 돌려주십시오." 다시 한번 로미오와 줄리엣
은 서로 입술을 찾는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제피렐리는 오페라와 무대극을 스크린으로 옮길
줄 아는 몇 안되는 감독이다. 그의 오페라 영화 '라 트라비아타'(82년)
와 '오델로'(86년)는 무대 실연을 보지못한 대중들에게 오페라의 진수
를 맛보였다.

제피렐리라는 성이 모차르트 '코지판투테' 아리아에 나오는 제피레
티의 오기였을만큼, 오페라를 사랑한 가문답게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
을 마치 오페라 연출하듯 시적 리듬이 담긴 드라마로 조율했다.

때로 감상적 주제곡이 예술의 깊이를 가로막고, 폐부를 지르는 원작
시어들이 경박한 연애담으로 바뀌었다 해도, 관객 마음속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미지는 영원히 레너드 화이팅과 올리비아 허시로 각인됐다.

< 이성복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