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3년 국기로 제정…수난과 영광 속 겨레의 구심점 역할 ##.


태극기는 영욕으로 점철된 근대 민족사 속에서 국가의 상징으로 연
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세계 만방에 휘날린 태극기가 있었고 때로는
좌절과 비겁을 뚫고 일어선 태극기도 있었으며 민족을 하나로 묶어준
겨레의 얼로 태극기가 있었다. 역사속에 나타난 태극기의 애환과 비화
를 알아본다.

좌절된 태극기 원형 우표
1883년 고종 황제가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한 다음해 우정총국(현 우
체국)이 창설되자 고종은 우정국 설립 기념과 태극기의 대 국민 홍보,
그리고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우리나라 최초 우표
에 태극기의 원도를 넣어 발행하려 했다. 그 당시 국내 인쇄술이 취약
해 일본 대장성에 인쇄를 의뢰했는데 일본 인쇄국은 엉뚱하게 태극 도
안이 아닌 중국 태극 도형을 삽입했다. 일본의 간계가 숨어 있었던 것
이다.그나마 이 최초 우표가 우리나라에 인계될 때는 갑신정변의 실패
로 우정총국 총판 홍영식이 피살돼 우표를 인수받을 책임 부처와 책임
자가 없었다. 더욱이 인쇄대금 지불이 어려워지자 1885년 인천에 있던
독일계 우표 상인 '세창양행'에 우표를 팔아 인쇄 대금을 지불했다.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
1883년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했지만 조선 조정은 2년 후인 1885년
한·러수호조약과 같은 국제행사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지 못했다. 태
극기가 국민들 사이에 국가 상징물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1896년
11월21일 독립문 정초식에서 독립문 상단에 태극기 두 개를 새겨 넣고
정초식 행사를 거행하면서이다. 수백명이 참석한 이 정초식에서는 태
극기가 정식 국기로 국민들 사이에 심어졌고 곡조 미상의 애국가도 불
러 국민들에게 '독립' '애국' '국기'라는 것을 느끼게 만들었다.

태극기 게양 금지 사건
1909년 이등박문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평양역 환영식에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들고 환영을 나오라는 일제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태극
기만 들고 나온 것을 문제 삼은 사건이다. 일제는 당시 평양의 대성학
교 교장이던 안창호에게 책임을 덮어씌워 평양경찰서로 연행, 심문을
했다. 이때 안창호는 일갈했다. "한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
듯이 한 나라에 두 나라 국기가 게양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사
건으로 당시 평양역 환영식에 참가한 모든 학교는 태극기를 게양하지
못하도록 하는 태극기 게양 금지령으로 비화되었다.

3·1운동 당시 평양 숭실학교 태극기
1919년 2월27일 밤 숭실학교 4학년생이던 김건은 윤후삼 당시 숭덕
소학교 교사로부터 독립선언서 1천여장을 건네받았다. 이때 그에게 스
친 것은 한·일합병 당시 숭덕소학교 4학년때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들
은 마지막 태극기 하강식 순간의 말이 떠올랐다. "너희 손으로 내린
태극기를 언젠가는 너희들의 손으로 반드시 올릴 수 있어야 한다."


는 이튿날 평양 시내에서 태극기를 만들 천을 구해다가 동료 3명과 함
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한·일합병 이후 태극기를 본 적이 없는 그는
기억을 더듬어 옥양목에 검은 천과 붉은 천을 오려붙여 태극을 만들고
4괘를 검은 천으로 만들었다. 그는 3월1일 오전11시 손수 만든 태극기
를 감추고 있다가 학교 정문앞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한뒤 평양
시내로 들어가 독립선언문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숭실 교정에 걸린
태극기는 일경에 발견돼 압수될 지경에 있었다. 그러자 서양인교장 사
무엘 모페트가 달려나가 일본 경찰에게서 태극기를 빼앗았다."우리 학
교 물건은 우리 것이다. 우리가 보관할테니 손대지 마라."

이 태극기
는 이듬해 교장 모페트의 아들 제임스 모페트를통해 몰래 미국으로 반
출되었다가 74년 모페트 교장의 유언에 따라 숭실학교 후신인 숭실대
박물관에 기증됐다. 가로 1m67cm 세로 1m27cm인 이 태극기는 태극이
상하가 아닌 좌우로 돼있고 4괘도 지금과 다르다.

필라델피아 독립선언식의 태극기
1919년 4월16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재미 교포들이 고국의 3·1
독립선언에 자극을 받아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시가 행진을 하고 있
다.이때 사용한 태극기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태극기 현기식
1942년 8월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청 광장에서는 미국 동맹국 28
개 국기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가 게양되는 의식인 현기식이
거행됐다. 빅토리 하우스에서 출발한 한인 악대와 태극기를 들고 뒤따
라온 행렬이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모이자 이승만 김구 등이 참석한 가
운데 열렸다.

먼저 미 육군 군악대가 미국 국가를 연주한 뒤 이어 우리 애국가가
연주됐다. 이 현기식은 비록 임시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
했지만 미국 하늘에 공식적으로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당당히 임시정
부의 존재를 알렸다. 특히 이날을 현기식으로 잡은 것은 1910년 8월29
일의 경술국치를 잊지 않겠다는 교민들의 의지를 담은 날로 더욱 의미
있었다. 이후 이날은 교민 사회에서 '국기절'로 바뀌어 기념되었다.

이봉창·윤봉길 의사 거사 전날 태극기
1932년 4월26일 윤봉길 의사는 김구 주석의 주도 아래 일본 천장절
경축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상해의 일
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을 즉사시켰다. 윤 의사는 현장에서 잡혀 일
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윤 의사는 거사 전날 김구선생과
함께 태극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그해 1월8일 도쿄에서 일본 왕
을 폭사시키려다 실패한 이봉창 의사도 거사 전날 태극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9·28 서울 수복 뒤 중앙청에 올려진 태극기
1950년 6·25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우리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
으로 서울을 재탈환, 9월25일 밤 해병대 1소대는 서울시청까지는 탈환
했으나 적의 수중에 있던 중앙청은 미군의 작전 구역이기 때문에 진격
을 멈추었다. 그러나 당시 해병대 1소대장이던 박정모 소위와 최국방
이병은 "우리 손으로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자"며 26일 새벽 작전을 개
시,화염이 치솟는 중앙청으로 돌진해 허리춤에 차고 있던 태극기를 중
앙청돔 꼭대기에 꽂았다.

6·25 참천 학병 서명 태극기
6·25 당시 경주에서 학병에 지원한 19명이 출정 전에 각자 소감을
적은 태극기. '공부는 다음에, 충성은 이 순간' '충성은 조국에, 혼은
후손에' '경주 용사 가는 곳에 승리' '학도병은 간다.삼팔선으로' '대
한의 남아여, 전지로 가자' '내 강산 수호는 학도병 힘으로' '조국이
여, 젊은 피 그대에게 바치노라' 등 학도병의 젊은 혈기로 가득찬 내
용이 '남북통일'이라고 쓴 태극기에 가득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