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는 이야기'(1월1일 개봉)는 한국영화 제작현실에 대한 전방
위적 조롱을 담고있는 코미디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마냥 낄낄거릴
수는 없다. 그 조롱이 자조의 빛깔을 띠기 때문이다.
'세상밖으로'와 '맨?'으로 현실과 몽상 언저리를 맴돌았던 여균
동 감독은 이제 그 경계를 벗어나 아예 영화속으로 뛰어들었다. 보
는 이에겐 '달콤한 꿈'이지만 만드는 이에겐 '냉혹한 현실'인 영화
제작을 소재로 삼아, 그는 야유와 탄식을 뒤섞어 독특한 블랙코미디
한편을 만들어냈다.
구이도 감독은 여관을 배경으로 저릿한 사랑이야기를 찍고 싶어
한다. 그러나 3류 에로배우 말희와 야비한 남자배우 하비는 각각 자
기 역할을 좀더 키워달라며 영화 성격까지 바꾸려든다. 준비에 난항
을 겪던 구이도는 둘이 실제 섹스하는 장면을 찍어 활용하려다 곤경
에 빠진다.
'죽이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싸움판이 된 야외촬영장소에서 시작
한다. 스태프와 구경꾼들이 벌이는 난장판에서 벗어나 천천히 하늘
을 비추던 카메라가 다시 왼쪽 아래로 내려서면 좁은 달동네 비탈길
이 있다. 이어 카메라는 집으로 돌아가는 구이도 감독의 눈이 돼 골
목길을 흔들흔들 따라가다 허름한 그의 집 대문앞에서 멈춘다. 상당
히 긴 롱테이크로 찍은 이 장면엔 사실감독이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
들이 모두 들어있는 듯하다.
하늘(꿈)에 머물고 싶지만 곧 땅(현실)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는
카메라의 운명, 복마전같은 영화제작 실정에 대한 냉소, 그럼에도
좁은 골목길을 누빌 수밖에 없는 영화인으로서 신산한 삶에 대한 초
라한 자화상 같은 것들이다. 어쩌면 이후 전개되는 한바탕 해프닝은
길고 긴 부연설명에 불과할 수도 있다.
스스로 이미지를 파괴하며, 천박한 여배우 말희역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낸 황신혜의 연기가 강렬하다. 문성근과 이경영도 익숙하게
제몫을 해냈다.
다만, 영화관계자들에게 절실한 우화일 수 있는 이 영화가 무심
한 관객에겐 고삐풀린 코미디쯤으로 비칠 수도 있다. 작품 리듬을
거스르며 작위적으로 짜맞춘 결말 때문에 더 그렇다. < 이동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