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타석 5안타. 그중 홈런 두 방. 선구안이 좋아 직구나 변화구 모
두에 능한 대형타자. 판단력과 주력을 동시에 갖춰 도루능력 탁월. 위기
를 역전의 찬스로 바꾸는 수비능력도 일급.
한석규(33)는 위기에 처한 한국영화가 굳게 믿는 단 한명의 슬러거
이다. 95년 '닥터봉'으로 첫 타석 등장한 이래 다섯 작품을 모두 안
타로 쳐냈다. 그중 '접속'과 '은행나무 침대'는 역대 한국영화 흥행랭
킹에서 3위, 5위를 차지한 대형 홈런이었다.
97년에는 연달아 세 작품을 성공시키는 괴력을 휘둘렀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능력이 단지 연기력이나 개인적 스타성에만 의
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무엇보다 시나리오를 골라내는 선구안
이 뛰어난 것으로 이름났다.
'초록물고기'나 '접속'같은 직구 스타일 작품뿐 아니라'넘버3' '은
행나무침대'처럼 변화구 스타일 영화에도 적응력이 높다.
모두들 방심하는 사이, 예측불허 주루 플레이로 한국영화에서 소외
됐던 리얼리즘이라는 베이스를 훔쳐 '초록물고기'로 평단으로부터 열광적
지지를 얻어내기도 했다.
'접속'은 준비기간이 거의 2년을 끌면서 출연여부로 난항을 겪었지
만, 일단 촬영이 시작되자 성실한 수비자세로 위기를 찬스로 바꾸어 놓았
다.
한석규 성공사례는 90년대 대중문화계 전체를 돌아보아도 유례를
찾기 힘든 수수께끼다. 데뷔 2년동안 외형적 성공도 대단하지만, 속내
를 알고나면 그 질에 더 놀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작 '8월의 크리스마스'까지 여섯 작품 모두
신인감독과 작업을 했다는 점이다.
중견감독 이름값에 기대지않고, 성공확률이 불투명한 신인감독 영
화만 골라 출연한 것은 두둑한 자신감과 작품을 고르는 안목을 그대로 과
시한다.
"신인감독 작품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한석규는 "그러
나 신인감독들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하고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다. 긍정
적이고 도전적 자세를 지니고 있는 것도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일치한다"
고 밝혔다.
특정 장르에 고집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작품에서 제각각 성과를
얻어낸다는 것도 놀랍다. 마치 관할구역을 차근차근 넓혀가는 싸움꾼
처럼 멜로, 팬터지, 코미디, 사회물까지 다양한 장르에 도전한다.
그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메소드 연기법을 신봉한다.
그렇듯 자기 색깔을 내세우기보단 갖가지 배역에 몰입하기를 즐긴
다. 그래서 그가 딱히 좋아하는 장르도 없다. 한석규라는 주연배우를
지녔다는 점을 제외하면, 여섯작품 사이엔 거의 공통점이 없다.
그런데도 그 영화들이 모두 히트했다는 사실에서 그가 가진 힘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다.
간단한 질문에도 심사숙고해 말을 고르고 골라 느릿느릿 이야기하
는 화법은 완벽주의자 한석규의 면모를 잘 말해준다. 한 작품을 찍는동
안 개인적 스케줄도 거의 잡지않는 스타일에선 성실함을 엿본다.
스스로 최고작으로 꼽는 '초록물고기'의 뛰어난 연기에서는 자기
삶에서 감정을 직접 길어올릴줄 아는 배우의 깊이가 담겨있다.
결국 그의 성공은 재능과 삶, 그리고 노력이라는 세 원천이 합쳐
이룬 연기력에, 작품이라는 그릇의 크기와 용도를 단박에 알아채는 눈썰
미와 후각이 결합한 결과다. 하지만 그는 아직 최고 연기자가 아니다.
성공 정도에 비해 그는 아직 폭발적 스타성을 갖추지 못했고, 카리
스마도 약하다는 지적을 종종 받는다.
한석규는 "선 굵은 연기에 강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관객은 결국 미세한 부분에서 감동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는 "연기자는 제각기 지닌 재료가 다르다"며 "섬세한 연기만 완
성하는 데도 평생 걸릴 것"이라고 했다.
배역 밖으로 배우가 새어나올만큼 에너지가 강하면 생명력은 반비
례하기쉬운 법. 어쩌면 무색무취에 가깝고 다소 정적인 스타일이 강력
한 무기일는지도 모른다.
어느때보다 어려울 98년 한국영화계를 바라보자면 한석규는 유난히
돋보인다. 그의 운신 방법이 곧 한국영화 생존법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성공은 화려하지만 비결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건 관객을 최우선시하는
자세와 이야기를 중시하는 상식이다.
"작품을 선택할 때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관객이 관심을 가
질지 가장 먼저 고려합니다. 이야기가 볼품없으면 나머지 부분이 아무
리 뛰어나도 실패작이 됩니다. 영화란 결국 관객을 위한 것이지만 충
무로는 관객을 너무 쉽거나 어렵게 여겨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스타성이 아니라 성실함이고, 깜짝기획이 아니
라 정공법이며, 신드롬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 이동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