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1장 또다른 시작 ② ##.
허름한 요정의 얼굴마담으로 있는 영희에게 억만이 준 첫인상은 손님
중에서도 '봉'이라고 불리는 전형이었다. 아무런 실속없는 허세의 대가
로 술값바가지를 쓰고 제살을 깎으면서도 언제나 허허거리는 그를 보면
한심스럽기 그지 없었다. 특히 그가 그렇게 흩뿌리는 돈이 실은 범같은
아버지를 속여 장사밑천으로 끌어낸 것이며, 필경에는 호된 값을 치르
게 될 것이라는 걸 알게된 뒤로는 그가 딱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그도 전혀 계산이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봉
으로 취급되건 바가지를 썼건 그는 어쨌든 술집거리에서는 최고의 단골
로 우대받았고 원하는 것은 거의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달리 남에게 우
대받기를 기대할 데가 별로 없는 그이고 보면 봉이 되고 바가지를 쓰는
일이 실은 알맞은 값을 치르고 있는 셈이기도 했다.
영희가 그를 결혼상대자로 점찍게 된 일도 그랬다. 뒷날 그는 영희의
남편으로 좀 고달프긴 해도 긴 놀이판 같은 일생을 누리게 되는데, 그
걸 행운으로 볼 수 있다면 그 행운도 바로 그런 첫인상에서 왔다. 영희
는 영희대로 봉을 잡고 바가지를 씌운 것이었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당
시의 그가 영희보다 나은 아내를 얻을 가망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억만은 달리 말하면 자신의 추구에는 누구 못지 않게 집요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대상이 저급한 쾌락이었고 추구방
법이 천박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영희는 자신에게 유리한 면으로만
억만을 이해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호된 값을 물게 되었다.
전해 가을 내내 한눈 파는 법 없이 집안일을 거들던 억만은 겨울 들
이 농사일이 좀 한가해지자 바깥 나들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과는 딴
판으로 그 나들이는 건실하기 짝이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셔
도 주머니에 있는 푼돈으로 감당할 수 있는 대폿집이었고, 어쩌다 늦어
도 통금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영희에게도 성실한 남편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그렇게 묶여살게
된게 영희 때문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불평하는 법이 없었
다. 뿐만 아니라 잠자리에서도 충실하여 영희로서는 불편하고 불안했던
신혼시절을 뒤늦게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정월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아버지가 말죽거리 배밭에 새로
이 비닐하우스를 짓기 시작하자 억만은 아무 불평없이 그 유별나고 철
이른 농사일로 돌아갔다. 한겨울인데다 인색한 농부답게 꼭 필요한 자
재만사고 나머지는 몸으로 때우는 공사라 영희가 길에서 보기에도 고생
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번은 점심을 가지고 갔다가 바람받이
언덕에서 시퍼렇게 언 얼굴로 비닐하우스 골조를 얽고 있는 억만을 보
고 눈시울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스무평 짜리 비닐하우스 새동을 다 얽은 날이었다. 여러
날에 걸친 고된 일에 치인 탓인지 저녁에 돌아온 억만은 초저녁부터 허
리가 아프다고 누워 끙끙댔다. 영희가 더운 물을 대야에 담아와 찜질을
해주자 말없이 허리를 맡기고 엎드렸던 억만이 갑작스레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왜 그래?".
영희가 공연히 죄지은 기분이 되어 조심스레 물었다. 억만이 재떨이
를 끌어당겨 담배에 불을 붙이며 뜻모를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