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장 실존의 미로에서 ④ ##.
인철의 독서가 전공과의 친화를 포기한 것은 방학이 시작된 지 한달
남짓 뒤였다. 방향도 잘못 설정되고 설익은 주관과 학문에 대한 이해부
족으로 실패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가 상당한 열정과 집중력을 가지고
책을 읽은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길을 잘못 들었구나. 잘못 찾아왔다….).
그 방면의 학자들이 보기에는 그런 성급한 실망이 한심스럽기조차
하겠지만 나름으로는 진지하게 한탄하며 신비평을 소개한 책들을 덮은
인철이 오랜만의 외출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주인아주머니가 기대하
지 않은 잡비까지 가외로 집어주며 은근하게 말했다.
"우리 선생님이 무슨 시험준비 하는가 보지? 법과도 아닌데 고등고
시 준비라도 하는거야? 이거 책이나 사봐요.".
그 바람에 막연하던 인철의 외출에는 예정에도 없던 서점이 곁들여
지게 되었다.
한달이나 방안에서 틀어박혀 있어서인지 바깥의 추위는 뜻밖으로 매
서웠다. 그동안 두어번의 외출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가 집 근처의 다방
에서 정숙을 만나 한두시간 얘기를 나누다 돌아왔을 뿐이어서 집안에
있은거나 다름없었다. 거기다가 따져보니 계절도 가장 혹한기였다. 두
껍게 얼어붙은 한강이 정월말의 추위를 실감하게 했다.
처음 서강쪽으로 나가 강둑이나 거닐며 머리를 식히려고 했던 인철
은 그 추위에 쫓겨 시내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명동 입구에 내
리고보니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낯선 다방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다가
문득 주인 아주머니가 한 말을 떠올리고 찾게된 곳이 청계천 헌 책방
골목이었다.
거품 섞인 것이기는 해도 풍요로운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 헌 책방
골목은 시들어가게 되지만 갓 70년대의 문턱을 넘던 그때만 해도 그 곳
은 아직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신학기를 앞두고 책을 팔 사람들과
사려는 사람들이 뒤섞여 골목은 겨울거리답지 않게 북적거렸다. 인철은
꼭 어떤 책을 사겠다는 작정도 없이 그들속에 끼여들어 청계천을 따라
흘렀다.
막연한 중에도 처음 인철이 눈여겨 본 책들은 그 한해 강의실을 떠
돌아다니며 개론을 도강한 다른 전공 쪽이었다. 심리학, 미학, 논리학,
정치학…. 자기 전공분야의 개론들보다 더 출석률 좋게 들은 그 개론들
을 떠올리며 어느 쪽이 자신에게 더 재미있을까를 가늠하며 눈에 띄는
그 분야의 헌 책들을 뒤적였다. 어쩌면 그때 이미 그는 자신의 전공을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세번째 책방에 들렀을 때인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인철
의 눈을 끄는 책이 있었다. 대여섯권짜리 전집을 노끈으로 묶어둔 것인
데 책방에서 일해본 인철의 경험으로는 방금 누군가가 아쉬운 사람이
헐값으로 팔아넘기고 간 것인 듯했다. 아직 판매대 위로 옮겨지지 않고
계산대 앞에 무더기로 놓여진게 그런 추측의 근거였다.
인철의 눈길을 끈 것은 아마도 맨위에 있는 책의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존재와 인간', 익히 알고 있는 제목인데도 실제 책의 표지에 큰 글
씨로 도안되어 있으니 영 낯선 책같았다. 그위에 보다 작은 글씨로 '하
이데거 전집 1'이란 글씨를 다시 보면서 인철은 비로소 아, 그 책, 하
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인철이 그 책을 사려고 마음먹은 것은 또다른 연상 때문이었
다. 이태전에 죽은 시인 김수영을 추모하는 글중에 본 구절이 그랬다.
60년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실존주의에 주눅들어 하던 시인은 어느 날
받은 원고료를 몽땅 털어 하이데거 전집을 사고 두달만에 독파하여 그
주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