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이유를 만들어 준 것도, 아버지에게 장남 구실을 하게 해준
것도 발레였다. 부산 초읍초등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는 부산일보 사회
부 기자였다. 늘 바쁜 아버지는 내게 어렵고 먼 존재였다. 부산서중학
교 때였다. 가족들과 함께 여행갈 계획이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다 밤
늦게 들어갔다. 싸움으로 입에 멍이 든 채였다. 1시간 넘게 꿇어앉아있
어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을 안하셨다. 무서울 따름이었다. 한 겨울 맨
발로 마당에서 벌벌 떨어야 할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부산 동명공고로 진학하면서 더욱 멀어졌다.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하는 걸 좋아했지만, 인문계 고교 진학이 어려울 줄은 몰랐
다. 게다가 친구들과 어울려 술 담배까지 했다. 교장선생님이셨던 할아
버지를 비롯해 교육자 집안이었던 우리 가정에서 나는 '돌연변이'였다.
아버지는 학문에 뜻이 없는 나를 포기하셨다. 학교에서는 말없는 문제아
로 찍혔다. 갖가지 운동에서 그림, 피아노까지 배워봤지만 관심가는 게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어머니는 희망이 보이지 않던 내게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사람 만들어 보자는 생각 하나로 나를 '정금화 무용학원'으로
데려갔다.

신기하게도 무용에 빠져들었다. 춤을 추면 잡념이 없어졌다.

여전히 무서운 아버지에겐 무용한다는 걸 숨겼다. 내가 출연하는 작
품에 아버지를 모신 건 87년 무용극 '바보 온달'이 처음이었다. 마을 총
각 6명중 하나로 춤을 췄다. 공연후 아버지는 "무용 계속할 자신있냐. 무
슨 일이든 10년만 계속 해라. 결실이 있을테니"라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나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 용기 백배한 난 잠자는 시간 빼고는 춤으로 살
았다.

기대 이상 보람들이 나타났다. 87년 말 부산 KBS콩쿠르 대상, 88년
동아무용 콩쿠르 대상, 89년 아시아콩쿠르 2등…. 내 존재를 확인하는 과
정이었다. 아버지 말씀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게 네 길이다." 한마디
였지만 내인생을 확정하는 순간이었다.

93년부터 3년 동안 유니버설발레단에 있었다. 주역 발레리노로 '지젤'
'백조의 호수'에 등장했다. 아버지의 공연 관람도 잦아졌다. 한번은 "나
도 한번 무대에 서볼까"하며 농담까지 하셨다. 부자의 정을 되찾는 느낌
이었다.

보름 전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낮았다. "이젠 네가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넌 우
리집안 장남 아니냐." 전화를 끊고 난 속으로 흐느꼈다. '이젠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구나.'.

초등학교 2학년 겨울, 술에 취한 채 밤늦게 귀가하신 아버지가 내복
바람으로 춤을 춘 적이 있다. 어린 아들 앞에서 "이게 백조의 호수"라고
하셨다.

원래 아버지는 엄격하기만 한 분이 아니었다. 아들을 포기한 적도 없
었다. 묵묵하게 지켜봐 주시는 분이었다. 아버지! 아들이 마지막 춤을 출
때까지 오래오래 지켜봐 주세요. < 발레리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