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옥(63)씨는 해외 11개국 31개 매장에 자기 옷을 내건다. 파리컬
렉션에 시즌마다 참가하고, 기성복, 남성복, 해외진출, 국내 컬렉션 구
축,라이선스사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역에서 활기차게 일해왔다. 그
러나 그 출발점은 이화여대앞 양장점이었다.

그는 '패션'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60년대 중반, 양장점 주인으로
첫 발을 내딛은 이래, 자존심과 열성, 남다른 비전으로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개척해왔다. 그의 패션인생은 바로 국내 패션업계 행로
그 자체다.

34년 원산 태생. 어릴 때부터 멋부리는 데 관심이 많아 10살때 단
오 저고리를 지어 입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법관을 지망했다. 중앙
여고시절 학생회장을 하며 전교 1,2등을 다툴 만큼 야무졌다. 어머니
박순천 여사는 정견발표회나 국회 방청회에 딸을 데리고 다니며 '야망'
을 키워줬다.

52년 전란통에 부산에서 서울대 법대 입시를 치 렀지만 낙방했다.
1년동안 두문불출했다. 그러던 그를 바깥세상으로 불러낸 것은 서울대
총장실이 비서를 뽑는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3년동안 총장실에서 일했
다.

그리고 스물다섯에 결혼. 시부모에 시할머니 양칫물과 세숫물까지 아
침마다 떠다 바쳐야 하는 생활에 회의가 들었다. "이렇게 살면 안된다
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지요." 여고시절 을지로에서 우연히 들른
노라노 의상실, 일본 잡지에서 읽은 샤넬 이야기가 머리를 스치면서 그
는 처음으로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생각했다. 26세에 첫 딸을 낳아 돌까
지 쇤 다음, 명동 '이종천패션연구소'를 찾아가 1년동안 공부했다.

65년 분가하면서 시집살이에서 풀려나자 그는 이대 앞에 양장점 '디
쉐네'를 냈다. 옛 빠리다방 1층에 있던 이 의상실에서 그는 세련되고
깔끔하고 도시적인 옷을 만들었다. 3년뒤 명동으로 의상실을 옮기고 가
게 이름도 '프랑소아즈'로 바꿨다.

그는 남편 무역회사 이사로 이름을 걸어놓고 71년 유럽과 미국을 3개
월동안 일주했다. 그때 깨달은 것이 기성복 필요성. 돌아오자마자 고객
평균체격지수를 산출해 기성복 치마와 블라우스를 만들었다. 76년에는
대량생산체제에 들어갔고, 78년 아동복, 83년엔 남성복에도 진출했다.

그가 84년 뉴욕 유명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 바이어를 무작정 찾아
간 얘기는 유명하다. 바이어가 "너무 비싸다"고 하자 "나는 한국서 제
일가는 디자이너이고 내 옷은 작품"이라고 쏘아붙이고 돌아섰다.

"고부가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다간 싸구려 봉제밖에 남는 게 없다"
고 판단한 그는 다음 시즌을 미리 보는 컬렉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80년대 후반 뜻맞는 후배 디자이너들과 함께 2년동안 파리-도쿄 컬렉션
을 돌았다. 표구하기가 어려워 쇼장에 몰래 숨어 들어가기도 하고, 티
켓 한장을 가방에넣어 서로 집어던져 주면서 관람했다. 그렇게 해서 90
년 5월 탄생한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컬렉션은 국내 디자이너
들이해외 컬렉션에 진출하는 도약대 구실을 했다.

그는 자존심 강한 완벽주의자다. 예순을 넘기고도 흐트러지지 않은
날씬한 몸매와 흑백을 즐기는 깔끔한 매무새에서부터 그런 성정이 쉽게
읽힌다.

그는 요즘도 자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어나 작업한다. "섬광처
럼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마를 때까지 일을 계속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조만간 한국에서도 외국처럼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터가 분화되리
라 점친다. 그러려면 디자이너와 전문 경영인 분리가 시급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 이미경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