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시 복암리3호분이 학계를 흥분과 긴장 속에 몰아넣고 있
다. 평지에 우뚝 솟은 남북 40m, 동서 35m, 높이 6m의 거대한 이 고분
에서는 지난해 서기 6세기 금동신발, 금동말띠꾸미개 등이 나온데 이
어, 올해에도 비슷한 시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관 등이 출토
돼 화려했던 영산강유역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복암리3호분의 각론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이 고분은 한 봉
분에 여러 무덤이 있는 '분구'로, 이같은 무덤양식이 발굴된 것은 이
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고고학계는 "분구의 유래가 없기 때문에 지
금 어떤 해석을 내리든 추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의문 투성이"임
을 인정한 것이다.
이를 지난해 발굴단이 발표한 내용과 비교하면 학계의 고민을 이해
할 수 있다.
지난해 여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박물관측이 봉분 남단 중앙
부분 돌방무덤(석실)에서 옹관 4기와 금동신발 등을 발굴했다. 발굴단
은 "5세기말∼6세기초 마한의 수장급 고분을 발굴했다"고 자랑스레 발
표했다. 마한의 전형적인 무덤양식인 옹관묘가 나왔으며, 돌방무덤 구
조가 백제와 다를 뿐 아니라 봉분도 훨씬 거대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일부학자는 "일본서기 등을 근거로 마한이 서기 4세기 중반 멸망했다
는 주장은 재고해야 한다"며 "마한은 6세기 초까지 존속했을 것"이라
는 대담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발굴이 계속되면서 복암리3호분에는 돌방무덤 14기, 돌널무
덤(석곽묘) 3기, 옹관묘 15기로 모두 32기의 각각 독립된 무덤이있으
며, 일반적인 예와는 달리 이곳의 옹관묘가 시기적으로 돌방무덤보다
무조건앞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면
서 마한의 무덤양식도 백제처럼 돌방무덤으로 바뀌었다'는 정설을 생
각한다면, 돌방무덤보다 시기가 늦은 옹관묘를 사용한 집단이 복암리
3호분의 주인공일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지난 11월 초 발굴단은 공
식발표에서 '복암리3호분은 마한세력의 것'이라던 애초의 주장을 사실
상 철회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학계는 이 봉분이 마한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는 사
실에는 동의한다. 이건무 국립광주박물관장은 "'옹관묘=마한' 식의 이
해는 위험하지만, 마한과 관계가 없다면 그 많은 옹관묘를 왜 묻었겠
는가"라고 말했다.
봉분을 왜 분구로 만들었을까하는 것도 의문이다. 한병삼 전국립중
앙박물관장은 "전남지방은 전방후원분(앞은 네모나고 뒤쪽이둥그런 무
덤)등 독특한 무덤양식이 많은 곳"이라며 "이 지역 무덤양식을 전체적
으로 고려하면서 봉분의 흙을 면밀히 조사, 각 무덤의 선후관계를 명
확히 밝혀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와 마한의 관계, 영산강유역문화의 실체 등에 대한 해석의 실
마리를 담은 채 복암리3호분은 한국고고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