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가 18년이란 세월 동안 한 주제, 혹은 한 인물에 매달려 있
다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 성년에 이르는
세월을 바쳐 한 인물을 창조해낸다는 것, 어쩌면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작가였을 것이다.
캐드펠 시리즈는 그 작가의 이력과 작품의 출생을 살피는 것만으로
도 흥미를 끄는 소설이다. 작가 엘리스 피터스가 이 소설 시리즈의 첫
권인 '성녀의 유골'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 그녀의 나이 64세인 1977년
이었으며, 마지막 권인 '캐드펠 수도사의 고백'을 탈고한 것은 1994년
이었다. 그리고 1995년에 세상을 떠났다. 생애의 마지막 불꽃을 모두
이 소설 시리즈에 바친 셈이다. 그러고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 캐드펠
수도사의 인간적 면모와 영적인 깊이는 작가 자신의 내면을 반영한 것
이며, 이 소설 속에 녹아 있는 인간의 애욕과 열정은 작가 자신이 한
생애를 건너며 체득한 '인간에 대한 보고서'라 할만하다.
나는 별 생각없이 집어든 이 책의 표지 앞뒤를 채우고 있는 작가의
이력에 끌려 읽기 시작했다가 밤새 중세의 수도원에서 저자거리로, 오
랜 고서의 방들에서 안개 낀 다리 밑을 헤매고 다닌 기분이다. 중세
교리와 잠언의 어두운 미로 속을 나왔다하면 어느새 약초의 향기 짙은
허브밭이나 약제실에 앉아 있었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시간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중세의 의상과
색채와 소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풍부한 묘사의 힘으로 12세기
영국인들의 삶과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이 실감있게 다가온다. 여기에
작가의 격조 있는 문장과 탄탄한 구성에 실려 중세 영국이 되살아오는
듯하다.
캐드펠 수도사란 인물의 전형도 상당히 흥미롭다. 그는 십자군 전
쟁에서 퇴역하여 수도원에 은둔한 늙은 수도사이다. 소설 속의 표현을
빌자면, '표류하던 배가 마침내 고요한 항구에 정박하듯 만년에 들어
서야 비로소 수도원 생활을 시작한' 늦깎이인 셈이다. 그는 자신의 생
에 쌓인 체험의 어느 것도 버리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 '전투와 모
험을 통해서 맛본 기쁨과 수도원의 정적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 사이에
서 어떤 갈등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는 경건하지 않다. 이 작품의
뒤에 출간됐으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처럼 현학적이지도 않고 엄숙하
지도 않다. 오히려 '향이 풍부한 음식을 좋아하는 자신의 식성 그대로,
사소한 악행으로 생에 풍미를 더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놓치려 하
지 않는' 인물이다.
수도원 뒷켠에서 약초를 재배하며 은둔생활을 하는 그를 사건 속으
로 불러낸 건 한 성녀의 유골이었다. 아니, 인간의 탐욕이었다. 경건
함과 엄숙주의, 신과 기독교의 외피를 쓴 수도원 고위 성직자들의 탐
욕과 웨일스의 마을 지주 아들의 애욕이었다. 고위 성직자들이 명예욕
과 출세욕을 가리는 위선의 두터운 외투에 찌들려 있다면, 소설 속에
사실적으로 묘사된 웨일스 벽촌의 무식한 소작농이나 대장장이들의 삶
은 당당하고 활기에 차 있다. 인간의 탐욕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보다 본격적인 스토리 구조, 추리소설 특유의 반전과 반전이 거듭
되는 재미와 박진감은 '99번째의 주검'이 더하다. '성녀의 유골'도 그
렇지만, 이 소설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이 소설
들의 말미에 붙어 있는 '부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소설들
의 특징은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들과 사건,장소와 상황을 정확한 사실
그대로 재현해두고 허구의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역
사적 사건 속에서 극적인 미스터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중세 유럽의 역사를 이만큼 재미있게 전하기도
어렵고, 이만큼 품격있는 추리소설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울 것같다.잠
시 세상사의 현장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근원적 욕망에 대해, 그 소
용돌이의 시작과 끝에 대해 성찰해보고자 하는 이들에겐 권할만 한 책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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