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사장 출신 공화당 루돌프 줄리아니, '안전한 뉴욕' 만들어 ##.
"아버지께선 존경받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중 택일하라면 존경받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제108대 뉴욕시장에 재선된 루돌프 줄리아니(53). 횅하니 벗겨진 이
마에 좁은 미간, 내려처진 눈초리에 사나와보이는 눈매, 날카로운 콧날
과 앙다문 입술이 그리 정감이 가는 얼굴은 아니다. 94년 1월 취임 벽두
부터 '마피아와의 전쟁'을 선언한 검사장 출신 시장이어서인지 지나간
자리엔 찬바람마저 이는 느낌이다.
하지만 길거리에 모습이라도 비칠 양이면 뉴요커들은 애칭 '루디'를
연호하며 주위를 둘러싼다. 웬만한 장소엔 늘 지프형 왜건차를 타고 다
니는 그는 시민들을 대할 때면 늘 파안대소하며 다정다감함을 보이려 애
쓴다.
그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너무 독선적이고
저돌적이라는 폄하도 있다. "욕심많은 독재자", "하여간 자신의 주변을
지배하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성격"이라는 비판도 듣는다. 하지만 초선
임기중 범죄율 하락, 시정의 효율성 향상 등 뉴욕의 면모를 일신했다는
점은 정적들 조차 인정한다. 덕분에 공화당 소속이면서도 민주당원이
5배나 많이 사는 뉴욕에서 역대 시장중 최고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뉴욕은 과거 세계 최대도시라는 명성과 함께 가장 지저분하고 위험한
도시라는 오명도 함께 갖고 있었다. 길거리와 지하철엔 집없이 동냥과
구걸로 연명하는 '홈레스'들이 들끓었고, 신호등에 걸린 자동차 유리창
에 썩은 비눗물을 문대놓고 돈을 요구하는 막무가내 떼쟁이와 타이어 휠
을 떼내 달아나는 족속마저 있었다.
권총 강도, 자동차 절도, 소매치기, 성폭행, 폭력사건 등은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살인사건만 연간 2천여건. 과잉반응 경찰의
총에 어린이나 청소년이 죽어나가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도 빈발했다. 마
약이나 불법총기류 거래가 공공연히 성행, 뉴욕 지하경제의 엄연한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감비노, 제노베세 등 뉴욕의 마피아 5대 패밀리는 연간 20억
달러(약 1조9천억원) 규모에 달하는 수입을 올리며 지하세계를 주름잡았
다. 건설업, 화물운송업, 쓰레기 수거, 신문배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연간 5천7백만㎏, 10억달러(약 9천6백
억원)어치의 어패류가 거래되는 최대 수산시장 풀턴 어시장과 엘리자베
스항 등 항구의 선적-하역작업에도 검은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줄리아니 시장은 우선 '어시장 영업개선 법안'을 시의회에 상정, 시
정부가 모든 도매-운반 영업면허 발급을 관리하고, 모든 종사자들의 신
원조사를 통해 조직범죄와 연계된 혐의자는 모두 면허를 박탈하겠다고
선언했다. 어시장의 마피아 조직원 및 하수인은 두 부류. 산매상인들이
산물건을 차에 실어주는 짐꾼(Loader)과 생선운반 컨테이너선과 도매업
체간 운반을 담당하는 하역꾼(Unloader) 그룹이 있다. 이들은 입출하 화
물트럭 출입을 멋대로 금지시켜 자의로 입하물량을 조정, 가격을 조작하
는 전횡을 일삼았다.
● 범죄 척결-삶의 질 개선 노린 '더블 윙 전략'.
줄리아니 시장은 '마피아와의 전쟁'과 함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전
쟁'을 병행하는 '더블 윙(Double Wing)' 전략, 이른바 2개 전쟁을 동시
에 수행했다.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환경"을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최대
관건으로 삼았다. "마냥 웃고만 다니는 '미스터 스마일' 시장은 아무 일
도할 수 없다" "시장이 거칠게 밀어붙이는 만큼 그 도시는 부드러워진다"
는 시정관을 내세워 불도저식 행정을 펼쳐나갔다.
그 결과는 곧 뉴요커 실생활에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다. 취임 2년여
만에 범죄율은 93년 대비 37%나 줄어들어 22년만에 최대 감소율을 기록
했다. 살인사건은 50% 이상 줄어 연간 1천여건으로 격감했다. 세계에서
가장 더럽고 위험하다던 뉴욕시 지하철은 깨끗하게 안전하다는 평을 듣
게 됐다. 대낮에도 지하철을 이용하기 두렵고, 전동차 맨 앞쪽과 뒤쪽에
타는 것은 범죄소굴에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는 옛 말이 됐
다.
그는 행정가로서 뿐 아니라 경영인으로도 수완을 발휘했다. 뉴욕시는
세계 경제 수도로서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높은 세율과 지나친 시
정부의 규제 및 간섭에 점차 기업들이 빠져나가는 추세를 보였다. 실업
인구가 뉴요커 7명중 1명꼴인 1백20여만명에 달했다.
이에 줄리아니는 각종 세제를 정비, 세율을 최대한 낮추고 불요불급
한 제도 및 절차를 철폐했다. 또 경제전문지 '포천' 선정 5백대 기업들
을 대상으로 뉴욕시에 잔류한다는 조건으로 각종 혜택 및 면제조치를 약
속, 고용 증대와 경제 활성화를 도모해나갔다. 한때 썰물처럼 빠져나가
던 굴지의 대기업들은 뉴욕에 다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고 새로운 기업
과 자본들이 대거 유입됐다. 또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각급 호텔의 객실 점유율에 따른 세금도 대폭 감면해줬다. 이로 인해 뉴
욕시는 민간분야에서만 약9만8천여명의 고용증대 효과를 거두었다.
비대해진 시정부에 대한 '다운사이징' 개혁작업도 벌여나갔다. 연간
예산 3백10억달러에 매년 20여억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시정
부식솔 21만4천여명에게 언제까지나 생계보장을 할 수 없다고 통고했다.
또 군살을 최대한 제거함으로써 민간분야와 균형을 살리고, 유관부서 통
폐합, 일부 기관 및 기구 민영화 등으로 재정적자 요인을 최소화했다.
구호대상자 지원제도인 사회복지법을 악용, 노동 능력이 있는 일부
계층까지 무위도식하는 부랑아로 전락하고 있다고 판단, 대대적 정비작
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초선기간중 구호대상자 숫자는 무려 15만명이나
줄어들었다.
"뉴욕은 이제 더 이상 '썩은 사과'가 아니다." 뉴욕시 별칭 '빅 애플
(Big Apple)'을 두고 한 말이다. 많은 시민들은 오히려 그의 '독단적 시
정'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 브루클린 출신 뉴욕 토박이.
줄리아니 시장은 전형적인 뉴욕 토박이. 44년 브루클린에서 노동으로
생계를 잇던 이탈리아 이민 3세로 태어났다. 61년 브루클린 소재 고교를
졸업, 브롱스의 '맨해튼 칼리지'를 마친 뒤 68년 뉴욕대 법대를 우등으
로 졸업했다. 이어 뉴욕남부 순회법원 로이드 맥하흔 판사의 시보로 들
어가 70년 정식 검사발령을 받는다.
29세가 되던 해 일약 마약전담반 책임검사로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했
다. 77년부터 4년간 뉴욕소재 '패터슨 벨크냅 웹 앤 타일러' 법률회사에
서 변호사 업무를 익힌 후 81년 연방 법무장관보로 기용됐다. 당시 이
직책은 사법부내 서열 3위의 자리로 사법부 직원 3만명 통솔과 연간 10
억달러의 예산집행을 총괄하는 막강한 자리였다.
그리고 83년에는 뉴욕남부 검사장으로 임명돼 금의환향한다. 정계 진
출을 꿈꾸어 온 그가 본격적인 채비를 차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 예의
주도 면밀한 계획과 저돌적 추진력으로 개성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마약
사범, 조직범죄, 시정부내 부정부패 연결고리, 화이트칼라들의 하이테크
범죄에 철퇴를 가하며 명성을 얻으면서 훗날 시장 출마의 발판을 마련한
다.
약 6년간 '루디'라는 이름을 충분히 각인시킨 89년 드디어 변호사 개
업을 하면서 첫 출마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데이비드 딘킨스 시장에겐
역부족이었다. 뉴욕시장 선거 사상 최소 표차이긴 했지만 4년후를 기약
하며 다시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93년 11월 '루디'는
워싱턴을 향한전진기지 뉴욕 시청에 화려하게 입성했고, 이번 재선으로
한발짝 더 다가서게 됐다.
가족관계는 '폭스 5' TV 아침쇼 '굿데이 뉴욕' 프로그램의 베테랑 저
널리스트이자, 케이블TV 'Television Food Network'의 여성앵커인 부인
돈나 하노버와 사이에 앤드루와 캐롤라인 남매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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