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츠의 유태인'
킴벌리 코니시 지음
영국 센추리, 352쪽
98년 3월 츨간예정.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는 왜 그토록 유태인을 혐
오하고 말살하려는 편집증적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 좀처럼 풀
리지 않는 이 미스터리를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났다. 오스트
리아·헝가리 제국은 대부분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독일인들, 민족
자치와 생활 향상을 요구하는 마자르인, 체코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남슬라브인 사이의 격렬한 민족적 갈등과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런 분위기 속에서 가난에 허덕이며 불우하게 자라난 히틀러는 열렬한
독일민족주의자, 반유태주의자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지금까
지 대부분 역사가들의 설명이었다.

그 외에도 유태인을 독일 기독교인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기
독교 교육에서 히틀러의 반유태주의 뿌리를 찾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히틀러가 유태인과 유태교를 혐오한 마틴 루터를 찬양했다는사실을 강
조한다. 그런가 하면 그를 무신론자, 신앙을 거부한 인본주의자 혹은
고대 노르딕 신화를 신봉하는 미치광이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설명
들을 뒤엎는 대단히 흥미롭고 새로운 주장이 호주의 한 철학자에 의해
제기될 예정이다.

호주의 철학자 킴벌리 코니시는 '린츠의 유태인-히틀러, 비트겐슈
타인,역사를 바꾸어놓은 그들의 만남'이라는 책에서 유태인에 대한 히
틀러의 적개심과 혐오감이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의 린츠라는 작은 도
시에서 함께 자라난 천재적인 유태인 비트겐슈타인과의 운명적 만남에
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책은 영국 랜덤하우스 자회사인 센추리사가 내년 3월 출간할 예정
이다. 이 책에서 코니시는 1904년에 찍은 빛바랜 사진 속에서 어린 히
틀러와 비트겐슈타인 모습을 찾아내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 '결손 가정' 출신 대 부유한 제철업자의 아들.

군인 정치가, 타고난 선동가, 유태인 대량 학살을 주도한 반유태
주의자,그러면서도 점령지 예술품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예술인을 극진
하게 대접하는 등 예술에 대한 끝 없는 동경을 지녔던 독일민족주의자,
불행한 삶을 자살로 마감한 독재자 히틀러.

맨체스터 대학에서 항공기 엔진 개발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공학
자, 버트런드 러셀이 '수학의 천재'라고 극찬했던 위대한 수학자,현재
까지도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논리철학 논고'
와 '철학적 탐구'의 집필자, 어려서부터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길고 어
려운 고전 음악을 대수롭지 않게 휘파람으로 암송하는 보기 드문 음악
적 재능을 지녔던 비트겐슈타인.

그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인류 운명을 담보로 한 필사의
싸움이 불가피했다는 것인가.

코니시는 우연히 한 장의 빛 바랜 사진 속에서 히틀러와 비트겐슈
타인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들의 감추어진 관계를 파헤
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4월 엿새 간격으로 각
기 상반된 가정에서 태어나 린츠라는 작은 도시에서 생활함으로써 동
일한 시간적·공간적 배경에서 성장한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사생아였다. 그는 가족에게 빈곤과
배고픔만을 유산으로 물려준 채 1903년 사망한다. 5년 후인 1908년 그
의 어머니마저 죽고 어린 히틀러는 정부에서 지급하는 고아 수당으로
연명한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히틀러는 '레알슐레'라는 실업계
중학교에 입학하지만 성적 불량으로 졸업장을 받지 못한다. 그는 화가
가 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미술학교에 두 번이나 응시하지만
낙방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가난과 실패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에 사로
잡히게 되고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분노, 유태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
성급하고 위협적인 격정의 소유자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부유한 제철업자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
모는 음악적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고 그들 가정에서 음악은 가장 중요
한 부분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부모에게서 풍부한 예술적·지적 재능
을 물려받았다. 그는 풍요로운 가정 환경 속에서 타고난 자신의 천재
적 재능을 공학, 수학, 철학, 예술 등 모든 방면에서 유감없이 발휘했
다.

그런 두 사람이 어린 시절 운명적으로 부딪치게 되었을 때 히틀러
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느꼈을 감정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너무나 명
백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천재성에 대한 히틀러의 좌절, 굴욕, 패배감
은 훗날 유태인에대한 히틀러의 불타는 적개심, 예술과 바그너의 음악
에 대한 히틀러의 광적인 열망을 모두 설명해주고도 남는다.히틀러 자
신이 '나는 이미 어린 시절 역사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 것
도 이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히틀러가 감옥에서 집필해 출간한 후 1943년까지 984만부나 팔린
'나의 투쟁'(Mein Kampf)은 그의 자서전이자 나치사상 해설서이다. 그
책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반유태주의가 한 사람의 유태인에 의해서 촉
발되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코니시는 그 인물에 대한 모든 묘사와 정황
이 비트겐슈타인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 코민테른 '제 5의 사나이'는 비트겐슈타인.

뿐만 아니라 코니시 주장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히틀러에 대항
하기 위해 코민테른(제3 인터내셔널: 제3차 국제 공산주의 동맹)에 가
입했다고 한다. 당시 캠브리지에는 히틀러에 대항하는 스파이들을 양
성하고 나치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제5의 사나이'로만 알려진 인
물이 활약했는데 지금까지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코니시는 이
인물이 코민테른의 지시로 캠브리지로 돌아가 트리니티 칼리지의 교수
로 재직했던 비트겐슈타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코니시 주장대로라면 비트겐슈타인을 겨냥해 쏜 나치 화살이 유럽
의 유태인들을 한줌의 재로 만들고 있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그 학살에
서 살아남아 끝내는 히틀러 몰락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과 유태인에 대한 히틀러의 치열한 적개심은 천재 음
악가 모차르트에 대한 살리에르의 분노와 증오를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