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팀 코치들은 내게 이런 농담을 많이 한다. "감독님, 이젠 부
모님 묘소에 삐삐를 넣어 드려야겠습니다." 사연인즉 이렇다.

감독 초년병으로서 힘든 정규시즌 126게임을 마치고 플레이오프가 시
작될 때 아버님 묘소에 인사를 갔다 왔다. '지금은 감독이 된 아들을 자
랑스럽게 생각하실텐데.' 큰 경기를 앞두고 있었지만 아버님 생전에 성공
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마음속엔 회한이 가득했다. 어쨌든 선수들에
겐 부상없이, 저에겐 용기를 주십사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나서 정말 이상한 일이 있었다.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서 2승2패
를 기록한 뒤 마지막 5차전을 앞둔 전날 나는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데이터 연구, 승리에의 욕심, 불안과 초조. 정말 이기고 싶었지
만 그만큼 괴로운 밤이었다. 얼핏 잠이 들었을까. 돌아가신 뒤 8년동안
한번도 꿈에서 뵌 적이 없는 아버님이 꿈에 나타나셨다. 그리곤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그렇게 고생하던 미국 연수시절 2년동안에도 없었던 일
이었다.

마지막 해태와의 한국시리즈를 앞두곤 정말 아버님께 삐삐를 치고 싶
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나타나지 않으셨다. 꼭 우승하고 싶었는데….

나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에 중-고등
학교를 다녔다. 다행히 우리 집은 조금 살기가 괜찮았던지 중-고등학교
6년동안 아버님은 야구부 학부형 회장을 맡으면서 학교와 야구부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70년대 경북고 전성기때의 멤버인 남우식-정현발-배대웅-
손상대 등은 자주 우리 집에 모여 같이 운동도 하고 시간을 보냈다.

요즘은 초등학교에서부터 각급 학교 야구부가 학부형들의 협찬으로 운
영된다고 한다. 그러나 20년전엔 선수들마다 집안 형편이 모두 어려웠다.
그런 시절에 아버님은 6년여를 혼자 야구부 뒷바라지하시고 전국 방방곡
곡 항상 따라 다니셨으니 사업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결국은 고교졸업과
동시에 사업은 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도 주변에 있는 야구를 좋아하
는 LG팬들의 사업 걱정을 많이 한다.

아버님은 중-고교시절 늘 내가 몸이 크지 않은 것을 걱정하셨다. "내
가 좋아서 야구를 시켰는데 몸이 크지 않으니…." 야구선수로 성공할 수
있을까를 염려하셨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 꼭 국가대표가 돼서 아버님의
걱정을 덜어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고 77년 드디어 대표선수로 뽑혀 아버
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