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방일영 국악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천흥(88)옹은 만년 무동
이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만큼 가뿐한 몸에 해맑은 웃음, 쾌활한
목소리가 평생을 춤과 음악에 바쳐온 예인의 순수함을 말한다.
그는 51년 이래 몸 담아온 국립국악원에 지금도 매일 출근해 후
학들을 가르친다. 국립국악원 원로사범실에서 오태진 문화2부장이
김옹을 만났다.
--지난해 미수를 맞으셨지요. 여전히 무척 건강해 보이십니다.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몇해전부터 귀가 잘 들리지않아 보청기를 쓰는 것 말고는 아프
거나 불편한 데가 없어요. 회갑 지나 돋보기 안경을 썼다가 눈이 다
시 좋아져서 벗었어요. 밤에도 신문을 읽을 정도입니다. 10년전부터
매일아침 40∼50분씩 맨손체조를 하고, 일요일마다 도봉산에 오릅니
다. 육식은 거의 안하고 밥도 반공기쯤으로 소식합니다.".
--요즘도 후학들 가르치느라 분주하시다고 들었습니다.
"매일 아침 국립국악원에 출근해 오후 3시까지 근무합니다. 방배
동 아파트에서 사무실까지 걸어 다녀요. 10분쯤 걸리는데 교통지옥
에 시달리지 않으니 신선놀음이지요. 서울대 국악과에 출강하고, 처
용무나 궁중무를 배우겠다는 사람들도 가르칩니다.".
--궁중과 민속 무악에 두루 능하신데, 어떤 분야에 더 애정을 지
니고 계신가요.
"처음 발을 들여놓은 쪽이 궁중음악과 궁중무용이에요. 민속악은
그 다음에 배우고 익혔지요. 맨 처음 전공 악기로 손에 잡은 해금에
가장 애착이 갑니다. 하지만 생애를 통틀어 보면 무용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늙어서까지 국립국악원에서 국
록을 먹는 것도 75년 외길을 걸어온 덕택이지요. 국록도 따지고 보
면 백성들 세금이니 '민록'이라 해야 맞겠지요. 그러니 지금부터라
도 할 일은 꼭 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지요.
"95년 LA에서 무악생활 73주년 공연을 한 게 마지막 공연이고,
다시 무대에 설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이조실록같은 기록을 뒤져
궁중무용 문헌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남창가곡 1백수 전곡 녹음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남창가곡은 1백가지가 악보로 남아있지만, 아무
도 부르지를 않아요. 목청이 좋지는 않지만 옛 스승들이 가르쳐주신
가곡면모를 남겨놓고 싶습니다. 신라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궁중음악 맥을 이은 김영제, 함화진 스승의 흉상도 꼭 세워야지요.".
--순종황제 50수 잔치에서 춤을 추신 일화는 전설처럼 남아있습
니다. 어떻게 잔치에 나서게 됐는지요.
"아악부원 양성소에 2기생으로 입소해 문묘악을 배우고 있다가,
어느날 선생님이 춤을 배워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선발된 학생들은
밤에 남아 춤 공부를 했지요. 봄이 돼서 분위기가 술렁거리더니 어
느날 나인들이 춤출 때 입을 거라며 옷을 지어 줬습니다. 일제 크림
과 박가분을 바르고 인정전 순종앞에서 춤을 추게 됐지요.".
--40년에 아악부를 나와 권번에서 일하면서 민속음악을 배우고
연주하셨지요. 갈등을 겪지는 않았습니까.
"아악부에서는 사범 격인 수장)까지 하다 승급 문제로 그만뒀습
니다. 그리고 권번을 운영하던 하규일씨 밑에서 일했지요. 낮에는
부설 양성소에서 기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사무실 일을 봤지요.
이때 민속무용과 민속악을 많이 접했어요. 민속악 모임인 '조선음악
협회'산하 조선악부에 들어가 만주까지 공연을 다녔지요. 민속악이
나 흥행세계를 접하다 보니 눈이 많이 트였어요. 민속악에도 훌륭한
예술성과 특장이 있다고 생각하고 많이 배우려 노력했지요.".
--민속악에 비해 정악은 아무래도 느리고 재미가 덜하다고 하지
요. 정악이나 궁중무용의 참맛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궁중음악이나 무용은 정적이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안정시켜줍니
다. 정신을 깨끗하게 하는 역할도 커요. 물론 민속악도 탈춤에서 팔
을 집어던지는 동작 하나만 봐도 예술성과 인간 정신이 담겨있습니
다. 하나만 알고 다른 것을 배척하는 태도는 옳지 않아요. 국악을
초등학교때부터 양악과 비슷한 비중으로 가르치면 틀림없이 사람들
이 국악을 더 좋아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옛날 전통예술 전수방법은 가-무-악 일체라고 합니다. 요즘엔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예술인이 적지않습니까.
"춤과 노래, 악기는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궁중무용 50여가지에
서 40가지쯤은 춤을 추면서 가곡이나 창사를 읊도록 돼있어요. 요즘
엔 대부분 다른 사람이 뒤에서 노래를 해줍니다. 심지어 테이프를
틀기도 하더군요. 춤과 노래를 동시에 느껴야 하지만, 교육과정이
그렇게 돼있지 않아요. 장고도 제대로 못치니, 춤 추면서 장단과 박
자도 못맞추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창작무용극도 하셨지요. 창작국악이나 창작무용에 대해서는 어
떤 입장이십니까.
"전통은 전통 그대로 전해져야겠지만, 예술은 창조입니다. 옛것
만 지켜서는 발전할 수 없어요. 하지만 현대무용이나 발레의 테크닉
과 형태를 따라하느라 급급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창작도 어디
까지나 우리 춤의 정신과 맛, 움직임, 가락에 바탕을 둬야지 주객이
뒤바뀌어서는 곤란하지요.".
--3남3녀중 예인의 길을 걸은 자녀는 한명도 없지요.
"아악부 시절, 23살때 결혼했어요. 박봉에 자식 여섯을 길렀지요.
국악하겠다는 자식이 있었으면 말리지않았을 텐데 아무도 나서지를
않더군요. 그래도 '갈급'을 받아가며 자식들을 다 대학까지 보냈습
니다.".
--이사를 많이 다니셨다면서요.
"아버지가 목수여서 어릴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헌 집
을 사서 고쳐 살다가 팔고 다시 이사가는 식이었지요. 55년 낙원동
에 무용연구소를 차린 뒤로는 전세, 월세집을 전전했어요. 발표회
한번 할때마다 빚을 져서 집사람이 뒤치다꺼리를 했지요. 그래도
몇해가 지나면 또 공연을 하고 싶어져요. 69년 공연한 '만파식적'
은 서울시 화상까지 탔지만 당시 돈으로 70만원이나 빚을 졌지요.".
--둘째 아들과 전세 아파트에 사시면서 95년과 97년 서울대 국
악과와 이화여대 무용과에 5천만원씩 장학금을 기탁하셨지요.
"93년 국립국악원 퇴직금 4천3백만원을 받았어요. 내가 처음 배
운 게 음악이다 싶어 서울대 국악과를 택했지요. 그러면서도 오늘
나를 있게 한 게 무용이다 싶어 마음에 걸렸지요. 마침 '무악70년'
이라는 회고록을 내면서 모아둔 돈과 미국 사는 아들이 보내온 돈
을 보태이대 무용과에 내놓았습니다.".
--방일영국악상을 받게된 소감을 말씀해주시지요.
"이렇게 큰 상을 받게돼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그저 늙은이 공
로로 주는 게 아니라, 앞으로 일을 더 많이 할 사람들에게도 상이돌
아가면 좋겠습니다." < 정리 = 이미경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