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최후의 24시간
해병대 ##.

김재규 정보부장은 암살준비지시를 내릴 때 주로 의전과장 박선호
와 이야기했다. 궁정동내에서 경비 병력을 관장하고 있는 것이 박선호
였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경호원들을 자신의 지휘하에 움직이는 병력
속에 집어넣어놓고 있었던 박선호가 그 시간에는 실질적인 경호실장이
었다. 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은 이날 밤의 두 주역 김재규와 박
선호가 짜놓은 상황 속에서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역할을 했다.

박 대령의 변호인 태윤기가 1심법정에서 "피고인은 군인 신분이라
단심으로 형이 확정이 되는데 마지막으로 빠진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
시오"라고 했더니 박흥주는 이렇게 말했다.

"이 건과 관련해서는 사전 계획을 몰랐습니다. 갑자기 말을 꺼내
그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상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마땅한것
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박선호도 김재규가 만찬장으로 돌아가고 난 뒤 고민에 빠졌다. 그
도 '총장이 와 있고 2차장보가 안 올 시간에 와 있으니 국내외 사정이
긴박하구나.부장이 총을 차고 나와서 각오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내
가 거부를 하면 성공이건 실패이건 살아남지를 못하겠구나. 부장이 육
군총장과 함께 유혈 쿠데타를 하는구나'하는 판단에 도달했다. 박선호
가 보기에는 부장이 단독으로라도 할 것 같았다. 부장이 각하도 포함
된다고 했지만 차지철 경호실장만 사살하고 각하는 납치 정도 하겠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경호원들에대한 공격을 준비하는 데는 제미니차
로 총만 싣고오면 2분도 안걸리는데 처음에는 한시간을 요구할까 하다
가 30분의 여유를 달라고 했다.

박선호는 항소심에서 "그때 왜 부장님을 쏘거나 밀고를 하지 않았
느냐고 저 보고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저는 그런 배신자가 되
고 싶지 않았습니다"라고도 했다.김재규는 법정에서 "명령은 선택적으
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무조건 복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시간을 두지
않고 강하게 명령했던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

이날 박선호가 취한 행동을 이해하려면 그와 김재규의 관계를 알
필요가 있다. 이때 나이가 45세이던 박선호는 대구의 대륜중학교 학생
시절에 체육교사 김재규를 알게 되었다.

박선호는 1953년에 해병학교
16기로 들어가 소위로 임관한 뒤부터 파월 청룡부대 대대장, 해병서울
보안부대장, 해병사령부 인사처장을 거쳤다. 1973년 10월 10일에 해병
대가 해군에 흡수되어 통합될때 예편했다. 박선호는 스승이기도 한 김
재규가 3군단장으로 있을 때 중학동기들과 함께 가서 인사를 나누는등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해병대에서 전역한 다음해인 1974년 4월 그
는 당시 정보부차장이던 김재규의 도움으로 정보부 총무과장으로 취직
했다. 김재규가 건설부장관으로 나간뒤에는 정보부 부산지부 정보과장
으로 옮겼다. 기자는 당시 부산에서 발행되고 있던 국제신문의 사회부
기자였다. 1976년 1월1일자 사회면 머릿 기사로 '포항에서 유징이 발
견되었다'는 요지의 기사를 썼다가 박선호 과장에게 불려가 조사를 받
은 적이 있었다.

정보부가 포항에서 석유시추를 하고있었는데 유징 발
견 사실은 보도금지가 되어 있을 때였다. 그때 기자의 기억에 남게 된
박선호는 '날렵한 몸집을 가진 부드러운 신사'였다. 소위 기관원으로
서의 건방진 태도를 느낄 수 없었다. 아마도 기자가 나쁘지 않은 대우
를 받았기 때문이겠지만.

박선호는 그해 초에 부산지부 정보과장직에서 면직되었다. 당시
부산에서는 서울에서 내려온 석진강 검사가 대대적인 밀수수사를 지휘
하고있었다. 밀수세력을 비호해온 정보부 직원들도 다수 조사를 받았
다. 이 검찰수사팀의 동향을 알아보려고 박선호가 도청을 시켰는데 이
것이 정보부의 내부 감찰에 걸려 그만두게 된 것이었다.

박선호는 군대와 정보부의 엄격한 상명하복 관계에 의하여 장악되
어 있었을 뿐 아니라 김재규와는 의리와 인정에 의해서도 운명적으로
엮여있었다. 박선호는 정보부 부산지부 정보과장직에서 면직된이후 한
1년 실직자 생활을 하다가 다시 김재규의 도움을 받는다. 김재규는 그
때 정보부장으로 부임해 있었다. 건설부장관 출신인 김 부장은 박선호
를 현대건설의 사우디 주베일 항만 건설현장 안전차장으로 취직시켜주
었다. 1977년 4월의 일이었다.

한 여덟 달 근무하다가 이듬해 2월에 돌아온 그는 중앙상사라는 유
류 수입상을 경영하게 되었다. 그해 8월초 김 부장의 의전과장으로 있
던 김인영이 회사로 찾아왔다. 그는 "부장님께서 당신에게 관심이 있
어 하신다"며 회사의 경영상황을 물어보고 돌아갔다. 8월7일 정보부장
비서실장 김갑수장군이 "좀 와달라"는 연락을 해왔다.

"정보부에 와서 다시 근무해볼 생각은 없는가."
"무슨 보직인데요."
"아직은 모르겠는데 부장이 알아서 해주실 거야.".

박선호는 자신의 회사가 그렇게 잘 돌아가는 것도 아니라 정보부
근무 제의를 승낙했다. 김갑수 실장은 그 자리에서 박선호를 부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김재규 부장은 박 과장에게 의전과장 자리를 제의한
뒤 "오늘부터 근무를 시작하라"고 했다. 그날로 김인영 과장과 인수인
계를 했다. 이렇게 하여 박선호는 이 역사적 사건에 말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박선호는 군 검찰 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 부장은 본인의 은사이고 직업도 알선해주시고 본인을 알아주고
아껴주어 고마운 생각을 항상 하여왔습니다.삼국지 대망 같은 책을 많
이 읽어라, 검소하게 생활하라, 우쭐거리는 행동은 삼가라는 등 좋은
말씀을 하여 왔기에 평소부터 존경해왔습니다.".

박선호는 이날 김재규를 보좌하여 전광석화 같은 암살작전을 펴는
데 있어서 해병대의 기질을 충분히 발휘한다. 이날 작전의 성공여부는
이 사나이의 행동여하에 달려 있었다. 그는 최초의 순간적인 주저와
번민을 즉시 극복하고 과단성 있게 행동을 개시한다. 박선호는 김재규
의 암살지령을 들은 뒤 골목길 건너편의 가동이라 불리는 신관 2층 자
신의 사무실로 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동원인원 선발을 생각한 바 우선 떠오르는 인물이 이기주였습니
다. 그는 본인 밑에서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인물로서 해병대 출신인
데 무엇을 시켜도 복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본인이 의전과장으
로 부임한이후 경비직에서 관리직으로 보직을 변경시켜주어 본인의 은
혜를 입은 자였습니다.(합수부1차진술서)].

그는 가동 1층 경비원 대기실을 거쳐 2층 사무실로 올라가면서 경
비원 관리책임자인 이기주를 불러올렸다.

"권총 하나 갖고 와."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