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 일을 한다는 것은 한명씩 젊은 날 우상을 잃어가는 과정일
지도 모른다.
내가 프로듀서로 출발하던 70년대 후반은 가요사에 남을 황금기였다.
이미자 김추자 펄시스터즈 윤복희 조영남 양희은 트윈폴리오 남진 나훈
아 하춘화…. 숱한 스타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스타와 가까워
진다는 것은 즐거움이었지만 그들을 가까이서 보며 그 전의 꿈을 잃는
건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내내 나를 매료시킨 우상이 그들 속에 있었다. 패티김. 나는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그 도도하고 당당함에 압도당했다. 당시 쇼
프로그램 조연출자였던 나는 그녀에게서 범접하기 어려운 신비의 카리
스마를 느꼈다. 노래속에는 타고난 천재성이 있었고, 선천적으로 타고
난 목소리는 국악을 통한 음악수업으로 더욱 탄탄하고 농염했다. 패티
김의 히트송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오랫동안 영혼을 적시는 노래
였다. 연출자가 출연가수를 우상으로 생각한다는 발상이 비상식적이라
할 사람도 있겠지만, 젊은 날 패티김은 내 최고 우상이었다.
그 우상이 베일을 벗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 기회가 딱
한번 있었다. 94년 5월 도쿄에 있던 길옥윤씨(패티김의 전남편) 부인으
로부터 전화가 왔다. 길옥윤씨가 암으로 2∼3개월을 넘기기 어려운 시
한부인생이라고 했다. 나는 일본으로 달려갔다. 길옥윤씨는 죽기 전 마
지막 소원으로 귀국 콘서트를 하고 싶다면서 피티김이 함께 출연해 주
기를 원했다.
94년 6월 19일 '길옥윤 이별 콘서트'는 음악 콘서트라기보다 긴 이
별 끝에 만난 두 사람의 화해와 용서의 다큐멘터리였다. 생방송 15분전.
몇년만에 만난 두 사람. 패티김은 "시시하게 아프고 그러느냐"며 가볍
게 질책했다.
심하게 흔들리는 감정을 컨트롤하는 코멘트였다. 죽음을 앞두고 휠
체어에 앉아 있는 길옥윤씨를 보고 게스트 가수들은 흐느껴 울었다. 그
러나 패티김은 얼핏 눈물이 비칠 것 같으면 카메라를 피해 돌아서서 노
래를 불렀다.
방송이 끝난 뒤 패티김의 분장실은 잠겨 있었고 30분 가까이 누구도
그 분장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절제력이 한꺼번에 무너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비로소 도도한 스타에서 가슴 따사로운 여인
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패티김은 이제 가수 데뷔 40년이 가까워왔고, 나도 24년째 연출생활
을 하고 있다. 얼마전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패티김은 아직도 청바지
를즐겨 입는다. 날씬한 몸매도 여전히 처녀 같다. 내가 "왜 고기를 먹
지 않느냐"고 물었다. "모르고 있었어요? 가수가 된 뒤로 아직까지 배
부르게 먹어 본 적이 없어요. 음식 한번 마음껏 먹는 게 소원이예요."
한끼쯤은 괜찮지 않느냐는 내 유혹을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 저녁으
로 야채나 과일만 먹고 견디는 게 고통스러워도 팬들을 위해 청바지 몸
매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프로듀서는 우상을 잃어가는 대신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직업
이다.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냈지만 젊은 날 내 우상들은 대부분 사라졌
다. 그러나패티김처럼 깨지지 않는 우상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 이남기 · SBS예능국장 >
패티 김 : 59년 미8군쇼로 데뷔한 패티김(본명 김혜자.59)은 보기
드문 대형 가수로 폭발적인 가창력을 보여줬다. 작곡가 길옥윤과 호
흡을 맞춰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던 그가 가수생활 38년동안 `4월
이 가면' `빛과 그림자' `서울의 찬가' `이별' `사랑하는 마리아' `못
잊어' `가시나무새' 등 수십곡의 히트곡으로 사랑받았다. 96년에는 대
중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