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 감독은 한국 축구의 당면 과제로 "이제 대표팀은 스타를 찾
고 만들어 내야 한다"는 '스타론'을 펼쳤다. 그러나 차범근 사단은 처
음부터 스타를 모아놓은 집합체가 아니었다. 스타 선수들을 데리고 전
략을 세운 게 아니라 세워놓은 전략에 따라 가능성 있는 선수들을 뽑
아 적재 적소에 배치했다.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감격을 이뤄낸 데
에는 그의 남다른 용병술이 큰 몫을 한 것이다.
차 감독이 이끄는 팀은 이전 대표팀과 달랐다. 고참 선수라고 특별
히 대우하는 법이 없었다. 대신 능력과 가능성만 엿보이면 무명 선수
라도 과감히 기용했다. 그의 지휘 아래에서 축구장은 냉혹한 실력 평
가의 무대가 됐다.
이에 따라 그가 맡은 대표팀은 평균 나이가 젊어졌다. 이번에 6차
례 치른 프랑스 월드컵 예선전을 보자. 미리 뽑아둔 33명의 상비군 가
운데 한번이라도 주전 선수로 뛰었던 사람은 총 21명. 이들 평균 연령
은 26세로 23세 이하가 전체의 24%나 된다. 25세 이상되는 선수는 전
체의 67% 정도를 차지했다.
이는 지난 96년 말 제 11회 아시아 축구 선수대회 4강 티켓을 놓고
이란과 대전했을 때 (6 대 2로 패배) 선수들의 평균 연령이 28세였던
것과 대비된다. 고전을 면치 못하던 당시 선수진은 주전 멤버 중 25세
이상이 전체의 93%에 달할 정도로 '노장파'들의 잔치였다. 23세 이하
는 이기형(22) 단 한명 뿐이었다. 당시엔 아무도 파격적으로 신진을
기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와는 달리 차 감독은 장대일(22), 김대의(23), 이민성(24), 최성
용(22)같은 신진을 대거 기용했다. 그는 베스트 11의 3배수인 33명을
일단 확보해 놓은 뒤 상황에 맞게 엔트리를 정해나갔다.
● 대표팀 평균 연령 두살이나 젊어져.
연공 서열 주의를 무시하다 보니 고참이라도 실력에서 처지면 가차
없이 엔트리에서 탈락시켰다. 대표팀 최고참인 고정운(31) 선수는 카
자흐스탄과 2차전을 벌일 때 부상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주전
선수로 나가지 못했다. 당시 그는 슬럼프에 빠져 있었고 차 감독은 예
외를 두지 않았다.
일부에선 "차 감독이 신예들만 아끼니까 고참들의 반발이 있었고,
감독의 고참 배제는 고참 길들이기 측면이 강했다"는 말도 나왔다. 그
러나 차 감독은 이런 평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생산성 향상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뭐든 불사하겠다는 자세다.
사실 그는 대표팀 감독이 되기 전 일찍이 '선수 사냥'에 나선 사람
이다. 현대 감독을 그만둔후 2년동안 차감독은 프로팀은 물론 대학과
고교축구 경기까지 쫓아다니며 머릿속에 선수 리스트를 구상했다.사적
인 친분을 우선한 선수선발이 아니라 백지 상태에서 '필드 연구'를 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묻혀버리고 말았을 법한 '흑진주'들을
잘도 찾아냈다. 김대의(23)는 차감독이 대표팀 선수로 발탁하자 "이런
무명 선수를 어떻게 투입하느냐"는 반론이 제기된 선수. 그러나 김대
의는 스피드가 떨어진 일본 수비의 왼쪽을 돌파하며 강한 슈팅을 날렸
고 "이번 경기의 조커는 김대의"라는 차 감독의 말을 입증했다.
최용수 역시 차 감독을 만나면서 부동의 스트라이커로 자리를 잡았
다.애틀랜타 올림픽 대표에서 탈락하는 좌절을 겪었던 이민성도 차 감
독의 예리한 감별력에 의해 발탁돼 한·일전서 역전골을 터뜨렸다.
● 매일 선수들 컨디션 체크…베스트 택해.
차감독의 용병술은 선수 선발에서만 장기가 발휘되는게 아니다. 그
는 평소 선수 운용에서도 프로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차감독은 선수
들의 하루 컨디션과 훈련평점을 매겨 컴퓨터 데이터로 저장해둔다. 세
분화된 점수는 중요 경기에 뛸 베스트 선수를 택하는 데 밑그림이 된
다. 한번 멋진 슛을 날렸다고 하더라도 그날 그날 점수가 하강세를 나
타내면 가차없이 엔트리에서 빠진다. 골키퍼도 철저히 실력으로 교체
한다. 골키퍼 서동명의 플레이가 불안해보이자 전격적으로 김병지로
바꾼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같은 운영 방법으로 차감독은 초기에 어
려움도 겪었다. 신세대들은 오히려 차감독의 새로운 방식에 빨리 적응
했지만 고참들이 적응에 애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포지션별 개발에도 최선을 기했다. 이민성과 장대일을 수비수
로 내세웠고, 최용수는 공격수로 배치했다. 또한 하석주 고정운으로
이뤄지는 왼쪽 라인에 치중하지 않고 오른쪽 라인을 개발했다. 오른쪽
라인에 있던 서정원 대신 이기형과 이상윤을 배치해 또 하나의 '작품'
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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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때 실전처럼 뛰는 선수만 선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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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표 선수들은 '차범근식 리더십' 밑에서 무엇을 생각하며 무
슨 각오로 뛰었을까. 이번에 경기에 참가했던 주전 10명의 육성을 들
어보았다.
▲고정운(최고참·31세·포워드)
"지난 10월18일 우즈베키스탄전서 개인 첫 골을 넣은 뒤 '한 골
넣기가 이렇게 힘드나'하는 생각을 했다. 지난 9월28일 일본전 실수
에서 벗어나지 못해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다. 부상으로 경기마다 20∼
30분밖에 못뛴 것도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요인이다. 어려운 점이 많
았지만 팀 최고참이라 내색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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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일(최연소·22세·수비수)
"10월18일 우즈베키스탄전서 첫 출전 기회를 준 차범근 감독께 감
사드리고 싶다. 대표팀서 가장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지만 기회만 닿
으면 뭔가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하석주(29세·미드필더)
"두달이 넘는 동안 합숙 생활을 했지만 선·후배 가릴것 없이 모
두들 열심히 뛰었다. 역대 어느 대표팀보다 선수들간 대화가 많고 화
합이 잘 이루어졌다.".
▲이상윤(28세·미드필더)
"5년 만에 대표로 복귀한 것 자체에 감격한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믿고 뽑아준 차범근 감독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어 기쁘다. 카자흐스
탄전때 두번째 득점 찬스를 놓쳐 부담이 됐다. 정신적 스트레스도 많
이 받았다.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
록 노력했던 것이 힘이 됐다.".
▲김도훈(27세·포워드)
"평소 기회가 주어지면 잘 하라는 말을 차 감독으로부터 들어왔
다.차 감독은 연습 때 실전처럼 뛰는 선수 중에서 엔트리를 결정하는
스타일이다. 경기 당일까지 몸을 좀 아끼고 싶어도 통하지 않는다.".
▲최용수(24세·포워드)
"선배들이 도와줘 잘못된 점을 많이 고칠 수 있었다. 예전처럼 중
간에 드리블을 하거나 스스로 상대 수비수를 제치는 플레이를 하고
싶지만 요즘은 골 찬스를 포착, 득점하는 것이 팀에 더 도움이 된다
고 생각한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훈련 과정을 충실하게 소화한 것
도 주효했다.".
▲서정원(27세·포워드)
"그동안 교체 선수로 뛰면서도 팀이 일단 이기고 봐야하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다. 골도 스스로 결정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큰 욕심은
버렸다.".
▲유상철(26세·수비수)
"미흡한 점이 많은데도 차 감독이 계속 신뢰를 보여줘 고맙게 생
각한다. 지금까지 월드컵에 나간 선배들의 경기를 보면 제 실력을 내
는 것은 고사하고 기부터 죽어서 경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최성용(22세·미드필더)
"유럽 축구를 봐도 신체 조건이나 기술이 우리와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않다. 정신 무장을 잘 한 뒤 부딪치면 괜찮을 것이다. 월드컵
본선진출엔 그라운드서 뛴 선수들의 공도 크지만 그늘에서 묵묵히 자
리를 지켜준 후보 선수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최영일(주장·31세·수비수)
"두 달 넘게 합숙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점이 많았다. 특히 한 번
도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선수들의 마음 고생이 심했다. 팀 주장으로
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현재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본
선에서도 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