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소설가 알랭 로브-그리예(75)가 14일 오전 주한 프랑스대
사관에서 '경마장가는 길'의 작가 하일지와 대담했다. 로브-그리예는
50년대부터 리얼리즘 소설의 전통적 문법에 반기를 든 누보로망(신소설)
운동의 선두 주자로 활약, 소설가-영화작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
다. 하일지는 프랑스 리모주대학에서 로브-그리예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90년대 한국문단에서 새로운 소설 양식의 탐구자로 꼽힌다.

▲하일지=한국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누보로망이 프랑스의 소
설사에서 발자크, 사르트르, 카뮈 등의 작품과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주시지요.

▲로브-그리예=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라고 시작합니다. 서술 화자가 확신을 갖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 발자크의 소설 '루이랑베르'의 화자는 '1897년
몽투아르지방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당나귀를 기르는 축산업자였다'라면서
등장인물의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식입니다. 발자크로대표
되는 전통적 리얼리즘소설은 이 세계가 단일한 의미로 꽉 차있다는 이데
올로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지적했듯이 카뮈의 소설에
서 각 문장들은 섬처럼 따로 떨어져서 의미의 연쇄고리를 이루지 않습니
다. 인간과 세계의 불일치, 삶의 불확실성과 애매성을 분명하게 드러
낸 '이방인'은 혁명적 작품이었습니다.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이
방인'이 제기한 소설적 혁명은 누보로망의 등장으로 인해 보다 폭넓고 다
양한 방법으로 일반화됐습니다.

▲하=당신을 비롯 나탈리 사로트, 클로드 시몽 등 일련의 누보로망
작가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 왜 하필이면 50년대입니까.

▲로브-그리예=2차대전 이후 서구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습
니다. 제 고향 브르타뉴는 미군의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됐습니다. 독일
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이처럼 전쟁으로 인한 파괴는 가치관과 민주주
의의 파괴도 가져왔습니다. 아우슈비츠의 학살은 이성주의의 종언을
가리켰습니다. 그전까지 서구를 받쳐주었던 이성적 사회란, 인간이라는
기계가 인간을 갉아먹는다는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의미
에서 종전 이후 서구의 합리주의에 의문을 제기한 누보로망은 '아우슈비
츠이후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발자크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나 멜빌의 '백경' 등 과거
의 소설들은 독자들에게 어떤 정보와 교양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누보로망에서 독자들은 그같은 실제적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로브-그리예=평론가 바르트가 말하길, 문학은 대답하는 것이 아
니라, 질문을 던질 뿐이라고 했습니다. 독자들은 고래사냥 지식을 얻기
위해 '백경'을 읽지는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면 당시 영국의
포도원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작품의 진
실은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숙성됩니다. 저는 문학이란 정보를 제공하는것
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당신은 종종 당신과 누보로망 작가들이 카프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로브-그리예=카프카는 '텍스트의 정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의 소설은 분명히 몽상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변
신'에서 인간이 벌레로 변하는 과정은 너무나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그
는 여행 중에 어느 카페에서 한 사내가 손에 유리잔을 쥐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실제 잔을 들고 마시는 듯 행동하는 것을 보고 형이상학적 명상에
빠졌습니다. 그런 카프카의 소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주어진 의미가 아니
라 숨어있는 의미를 부르고, 그 의미를 찾아 나서게 합니다. 제 생각에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작가가 있습니다. 자신이 이해한 것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작가, 아니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작가로 나뉩니다. 저는후자의 작가들이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는 점에서 더 낫다고 봅니다. 저는 '인간은 항상 그 미래가 비어있는 공
간'이라는 발레리의 말을 좋아합니다.

▲하=20세기초는 엘리트와 대중이 분리된 시대였지만, 이제 세기말
에 이르러 경제적 안정과 매스미디어의 확장으로 대중의 힘과 욕구가 커
지면서 선택된 소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같습니다. 특히 한국처
럼 짧은 시간 안에 발전을 겪은 사회일수록 더욱 더 빨리 대중이 새로운
세력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로브-그리예=저는 당신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늘날의 대중은 텔레비전에 의해 바보가 됐고, 인터넷 망도 역시 똑같은
결과를 낳으리라고 봅니다. 과거에는 못배운 사람이 지식인으로 상승하
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지식인들 조차 점점 아래로 녹아 사라지고 있습
니다. 제가 미국 대학에서 강의한 경험에 따르면 학생들의 수준이 점
차 낮아지고 있습니다. 20년전 대학의 영화학도들은 어떻게 새로운 영
상 언어를 만들까를 고민했지만 요즘에는 대부분 빨리 대학을 졸업해서
텔레비전 시리즈물을 만들어 돈 벌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