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누리증권 사장 취임한 김석기씨 ##.
"86년 말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박사 학위를 끝냈을 때 꿈은 교수였어
요. 그런데 월급이 너무 박해요. 월가로 진출한 것은 솔직히 돈 때문이었
습니다.".
'청년' 김석기(40)의 월가 도전은 돈을 벌려는 욕심에서 시작됐다. 월
가의 유력한 증권사 베어스턴스에 입사한 첫해 연봉은 40만달러. 기본급
20만달러에 그만큼의 보너스가 더해졌다. 미국 대학 교수 월급 4만달러의
10배에 이르는 액수였다. 그러나 돈보다 더 귀중한 것은 세계 금융 중심
지월가의 경험이었다.
그의 이력은 독특하다. 아시아계가 다른 분야에 비해 적은 월가에서
한국인은 정말 드물다. 그나마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현지에서 출생한
한국인 2세들이다. 김씨처럼 한국에서 군대까지 마치고 회사 생활을 하다
가 월가로 건너간 사람은 전례가 없었다. 서울대 경영학과 75학번인 그는
한때 대우그룹, 미국계 은행인 뱅크스 트러스트 등에 근무하다가 83년 뒤
늦은 유학을 떠났었다.
그러나 연봉 40만달러의 대가는 녹녹지 않았다. 1년 내내 휴일이 거의
없는 생활. 거래가 시작되는 주중에 대비해 장이 끝나는 금요일 밤부터
자료를 준비하고 토,일요일은 잇따른 회의와 장세 분석에 매달렸다. 밤을
새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여느 월가 사람들처럼 햄버거로 점심, 저녁 때우
는 것이 다반사였다. 평균 노동 시간 하루 16시간.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
는 공인회계사(CPA)와 변호사로부터 과외 수업을 받아야 업무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는 "이른바 와스프(WASP)라고 하는 '앵글로 색슨계 백인 신교도'들
이 주류를 이루는 월가에서 인종 차별을 넘어 출세하는 길이 실력밖에 없
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입사할 때 상사가 1년 만에 부하로.
덕분에 그는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입사할 때 제 상사가 1년 뒤 제
부하가 됐습니다. 이런 일이 월가에서는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문제로
쓸데없이 자존심을 구겨서는 아무 일도 못하는 곳이 월가다. 직원이 7천
명이나 되는 베어스턴스사에는 28살 된 부사장도 있었다고 김씨는 말했다.
나이고 연공이고 없다. 오로지 돈을 위한, 돈에 의한, 돈의 질서가 있
을 뿐이다.
그가 여기서 주로 회사 금융에 대해 배웠다. "기업 입장에서는 은행에
서 대출을 받는 것보다는 펀드매니저의 자본 투자를 받는 것이 더 유리합
니다. 이자 부담이 없으니까요. 성공하면 과실을 나눠가지면 되고 실패할
경우 손실은 펀드매니저가 모두 부담합니다.".
펀드 매니저는 돈이 되면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주식, 외환, 상
품 거래…… . 회사 금융은 그중에서도 가장 각광받는 분야 중의 하나다.
그는 입사 2년만인 88년 홍콩 지사장으로 승진해 부임했다. 일본을 제외
한 다른 아시아 지역 기업을 상대로 한 회사 금융이 그가 담당한 주업무
였다.
펀드 매니저는 조지 소로스의 환투기 등으로 인해 이미지가 상당히 악
화돼 있다. '부가가치는 창출하지 못하면서 경제를 교란하는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외환시장이 불안한 제3세계 국가들에서 이런
인식은 더욱 심하다. 그러나 김씨는 "이는 펀드 매니저 역할에 대한 오해
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자본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본을 공급하는 것이 자본시장의 기능입니
다. 유망한 기업이 자본이 없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한국도 그런 것 아닌가요." 되도록 많은 유휴 자본을 끌어들이고
그 자본이 가장 효율적으로 기업에 배분되도록 하는 것이 펀드 매니저 기
능이라는 것이다. 펀드 매니저의 무한 욕망은 그런 효율적 시장을 만드
는 일종의 유인책이라는 게 김씨의 주장이었다.
"월가에는 '아무도 시장을 이길 수 없다(Nobody Overcome Market)'는
속담이 있습니다. 조지 소로스는 외환시장을 조작하는 게 아니라 외환시
장의 대세를 미리 파악해 그 흐름에 편승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겁니다."
시장을 조작한다는건 월가의 비즈니스 상식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고된 생활을 하는 월가 맨들의 꿈은 40대가 되기 전 평생 먹고 살 돈
을 모아 월가를 탈출하는 것. 이 때문에 1백만달러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지만 그 수준에 만족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김씨도 마찬가지
다. "신나게 돈을 벌어서 2천년까지는 은퇴해야죠." 2천년이면 만 44세가
된다.
그는 홍콩에 온 뒤부터 은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돈을 벌 구상을 했
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홍콩 등이 그의 주 무대. 90년 그는 헤지
펀드사인 킴바코를 설립해 고대하던 독립을 이루었다. 그의 실력을 신뢰
했던 베어스턴스도 50%의 지분을 투자해 밀어주었다. 이런 인연으로 맡게
된 89년 텍사스 에너지사의 인도네시아 수력발전소 합작 프로젝트 수주
건이 킴바코라는 브랜드로 수행한 첫 작품이었다. 상대는 만만찮은 월가
의 거대 투자사 모건 스탠리였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자본금 4백만달러의
이 자그만 홍콩 헤지 펀드사는 자본이 1백억달러를 넘는 이 월가 거물을
이겨냈다.
김씨의 비즈니스 경험을 지난 94년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의 사례 연
구로 발표한 제임스 오스틴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
고 있다.
"89년 말 텍사스로 날아간 김 박사는 현대를 주계약자로 한 자신의 계
획을 텍사스 에너지 회사에 설명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았다. 그러
나 홍콩에 돌아오자마자 그쪽의 재무담당이사가 전화를 걸어 모건 스탠리
가 훨씬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쪽을 선택하겠다고 연락을 해
왔다. 김 박사는 즉시 좀더 자신의 계획을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
다. 그러나 이사는 거절했다. 그러자 김 박사는 직접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명이 미진한 부분이 있으니 다시 한번 브리핑할 기회를 달라'
는 것이었다. 그러자 회장은 '좋아요. 젊은이. 태도가 맘에 들었어. 언제
올텐가'고 물었다. 김 박사는 힘차게 대답했다. '지금 즉시요.'".
그는 저돌적이고 끈질긴 협상력으로 2억8천만달러짜리 이 프로젝트를
수주함으로써 실력뿐 아니라 협상력까지 갖춘 중견 펀드 매니저로서 월가
에 확실한 이미지를 심었다. 91년 킴바코가 42% 지분을 가진 인도네시아
증권 회사 'P·T 시그마 바타라' 설립 등 그는 그동안 왕성한 활동을 펼
쳐왔다. 93년 펩시콜라에 매각한 피자 헛 코리아, 95년 아남그룹과 미 증
권사 살로먼 브라더스 등이 참여해 만든 한누리살로먼증권 등도 그의 작
품이었다.
● 89년 모건 스탠리와 대결서 승리… 연극배우 윤석화씨 남편.
그의 회사는 홍콩에 있지만 김씨 자신은 여전히 월가 속에 자리잡고
있다. 올해 1억달러 규모로 조성한 '판 킴바코 동남아시아 펀드'의 주투
자자들도 대부분이 월가의 투자자들이다. 그의 펀드 수익률은 연 40% 선.
월가 우량 펀드들의 평균인 20%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다. 소로스가 올
해 킴바코 펀드에 대한 투자를 고려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한다.
그의 성공이 아직 무수한 큰손들의 신화가 떠도는 월가에서 회자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모교인 하버드대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버드 출신으로 한번에 1억달러의 펀드를 모을 만큼 성공한 펀드
매니저가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해마다 한번씩 모교를 방문해 학생들
을 상대로 실전 강의도 한다.
연극 배우 윤석화씨의 남편이기도 한 그는 88년 정착한 홍콩이 제2의
고향이다. 그는 처음 킴바코를 설립할 당시 한 일화를 소개했다. 홍콩
정청 증권감독원 부원장이 불러서 갔더니 "홍콩에서 일을 하게 돼 기쁘
다.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10월
1일 국내 한누리살로먼 증권 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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