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4장 변경의 아이들 ⑧ ###.
"제가 형한테 듣기로는…."
인철은 정숙의 정보원이 자신임을 황급하게 고백했다.인철의 그런 쪽
으로 유달리 예민하게 발달한 감각은 그런 전력이 현재의 황윤식에게는
상처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걱정한 때문이었다. 형 명훈은 그가 대우좋
은 일간지에 자리잡은 것을 타협이나 전향으로 해석하는 눈치였다.
"여학생이라 이 말을 이해할지 모르지만-- 호된 졸병시절을 보낸 고
참이 반드시 좋은 고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한때 데모주동자였다
고해서 모든 데모에 동정적이 되리라는 것은 너무 단순한 추리같은데.".
황윤식은 여전히 별 내색없이 그렇게 답했지만 내심으로는 그때 이미
동요를 느끼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용건이나 듣고 일어설 것 같던 자
세가 갑자기 이건 좀 얘기해볼 일이로구나, 하는듯한 눌러앉음의 자세로
변한 느낌이었다.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숙이 그런 그의 속을
한번 더 건드렸다.
"그런걸 사상적으로 말하면 청산주의라고 하나요?".
"인철과 동기라면 신입생일텐데 이 아가씨가 별 용어를 다 아네. 그
래도 변절이나 전향이라고 말하지 않으니 고맙군.".
그렇게 대답하는 황윤식의 얼굴에는 내심의 동요를 억지로 숨기려는
기색이 뚜렷했다.
"쟤가 원래 저래요. 물에 빠져도 입은 동동 뜰 애라니까요.".
인철이 다시 끼여들어 그런 농담으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어보려
했다.
정숙도 그제서야 자신이 좀 지나쳤다고 생각했던지 살포시 웃으며 애
교를 떨었다.
"실은 저도 인철이처럼 초월파예요. 무슨 악의가 있어 한말이 아니니
까 너무 껴들지 마세요.".
"초월파?"
"데모에 초연하다는 뜻이에요. 강건너파라고 하기도 하죠.".
그러자 황윤식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발동된 자
의식을 다 씻어낸 그런 미소는 아니었다.
"그 후배 아가씨 재미있네.".
그렇게 농담처럼 받아놓고는 시계를 보더니 이내 마음을 정한듯 말했
다.
"모처럼 나를 찾아왔으니 저녁이나 먹고 가라. 그렇지 않아도 명훈의
말을 듣고 널 한번 찾아볼까 하던 참이었다. 후배 아가씨도 다른 일 없
으면 함께 가고.".
인철에 대한 호의를 앞세우고는 있어도 그보다는 갑자기 무언가 할말
이 생긴 사람 같았다. 저녁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그가 그렇게 나오자
인철은 은근히 반가웠다. 처음 그를 만나려고 마음 먹었을 때 내심의 기
대중에 하나는 점점 강하게 자신의 의식을 건드려오는 삼선개헌에 관한
온당한 해석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기회가 자연스럽게 주어진 셈이었다.
인철의 짐작대로 황윤식은 먹는 일보다는 길게 이야기할 자리를 찾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다방을 나와 무교동 쪽으로 방향을 잡던 그가 갑자
기 청진동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말했다.
"밥보다는 막걸리나 한잔하며 얘기나 좀 하는게 어떠냐? 원래는 낙지
볶음으로 저녁이나 먹을까 했는데 너희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청진동
으로 가서 전라도식 막걸리나 한상 받자."
"전라도식 막걸리가 어떤건데요?".
그때까지 말없이 따라오고 있던 정숙이 호기심어린 말투로 물었다.
"선술집보다는 좀 비싸지만 막걸리 한되를 사면 열두가지 안주가 따
라 나오는 집이 있다. 그것도 아주 정성이 들고 맛깔스런 안주로 나오는
데 사람들은 그걸 전라도식이라고 그러더구나. 내가 가려는 집은 그중에
서도 어떤 유명한 월북시인의 아내인가 애인이었다던가 하는 여자가 경
영하는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