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찾아간 대암산 용늪은 대낮에도 안개가 짙게 깔렸다. 동
행한 생태탐사단 일행의 모습이 30m만 떨어지면 시야에서 사라졌다. 군
부대 트럭으로 산을 오른지 40여분. 대암산 정상 아래 능선에서 신갈나
무숲을 1백m쯤 헤치고 만난 용늪은 사람을 피해 숨기 위해 안개 속에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
산 아래는 아직도 9월의 해가 피부에 따가운 날씨. 하지만 표고 1천
2백80m 지점에 펼쳐진 늪지에선 옷속으로 파고드는 안개바람이 싸늘했
다. 무릎까지 자란 수풀을 헤치고 지나갈 때마다 축축한 느낌이 발바닥
으로 전달됐다. 간혹 작은 구덩이들을 피해가야 했다.
정부는 강원도 양구군 동면과 인제군 서화면에 걸쳐 있는 이곳 용늪
일대를 89년 12월 자연생태계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94년 이후로는 주
위에 울타리를 치고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올 7월에는 우리나라에서
는 최초로 습지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인 람사협약 등록습지로 지정됐다.
전체 넓이가 약 9천평, 큰 용늪만 따지면 2천2백여평에 불과한 산속
습지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 어차피 내버려둬도 사람이 찾을 성 싶지
않은, 그저 잡풀들이 우거진 풀밭으로 보이는 이곳을 울타리를 치면서
까지 보호해야하는 이유는 뭘까?.
탐사단을 이끈 충북대 강상준교수는 "보기드문 고원습원을 유지하고
있는 용늪은 수천년의 생태기록을 담고 있는 '자연의 고문서'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울산대 최기룡교수 같은 이는 "신안유물보다 값진
'생태유적지'이며, 한반도 자연환경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
는 타임캡슐이자 유전자 창고"라고 말했다.
그 열쇠는 늪지 토양을 이루고 있는 고사한 식물더미들이다. 최교
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용늪 일대는 10월부터 4월까지 영하의 기온이다. 동해쪽에서 불어오
는 습한 바람으로 연간 안개일수가 1백70일에 달한다. 5월부터 9월까지
짧은 기간동안 자란 물이끼나 산사초, 가는오이풀 등 습지식물들은 7개
월이상 계속되는 '겨울' 동안 얼음 속에 잠기게 된다. 그러면서 거의
분해되지 않은채 쌓여 이탄층으로 쌓이게 된다. 그 이탄층 속에는 주변
에서 날아온 각종 식물들의 꽃가루와 종자들이 썩지 않은채 보존된다.".
강교수와 최교수는 이곳 용늪 이탄층에 수직기둥 모양의 구멍을 뚫어
그 샘플을 미국 크루거사의 지오크론 연구소로 보냈다. 이탄층이 형성
된 연대를 방사성탄소측정법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용늪의 나이를
재본 셈이다.
그 결과, 1백55∼1백70㎝ 깊이에서 채취한 샘플의 연대는 약 4천1백
년전에 해당했다. 1백∼1백10㎝ 깊이의 샘플은 3천5백년전에 형성된 것
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대략 1년엔 1㎜ 두께로 이탄층이 쌓여가고 있
음을 확인했다. 이를 토대로 수직기둥 이탄층 샘플에서 수거한 꽃가루
와 종자들의 성장연대도 계산이 가능했다.
약 4천년전으로 추정되는 이탄층 바닥에서는 물이끼 고사리 우산이끼
등 습지 하등식물의 포자가 남아 있었다. 그 뒤 3천∼3천5백년전에는
참나무 종류의 신갈나무가 주변일대에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고, 2천5백∼
3천년전에는 양지식물인 소나무의 꽃가루가 우세하게 발견됐다.
강상준교수는 "자연적으로는 신갈나무 군락지가 소나무 군락지로 변
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약 3천년전쯤 대암산 주변지역에 원시
림을 벌채해 농사를 짓던 농경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기룡교수는 습지 바닥층에서 멸종식물 종자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으로기대하고 있다. 의외의 유전자적 가치를 갖고 있는 멸종종자들이
발견될 경우 이는 제약 또는 농업분야에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는 설명이다.
그러나 용늪은 지난 67년 최초 발견 이후 30여년동안 서서히 훼손되
어 왔다. 지난 77년엔 주변 군부대에서 늪 중앙에 길이 90m의 스케이트
장까지 조성했다. 그러면서 바닥의 이탄층을 긁어내 스케이트장 주변에
둑을 쌓았으며, 그 뒤로 지하수의 유출속도가 빨라지면서 늪지의 건조
화가 가속화됐다.
10일의 탐사에서도 철쭉과 신갈나무 등 숲속 식물들의 침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삼희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