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력세계와 주변정세 통찰한 철저한 리얼리스트 ##.
KBS 드라마 '용의 눈물'의 시청자인 강천석 조선일보 편집부국장과
연출가 김재형PD가 지난9월8일 오후 KBS 본관 출연자 대기실에서 1시
간30여분간 대담을 가졌다.
강천석 부국장='용의 눈물'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방영 초부터
지금까지 거의 빠짐없이 드라마를 봐왔고 어쩌다 건너뛸 때는 중1짜리
막내아들에게 방영 내용을 전해듣곤 했습니다. 모시고 있는 일흔이 넘
으신 장모님은 열렬한 팬입니다.
김재형PD=시작은 30∼50대 남성 시청자를 대상으로 기획했는데 드라
마가 진행되면서 보니까 여성 시청자가 늘더군요.
강=이 드라마가 시청자를 이끌어 가는 매력은 각 단계마다 새로운
갈등 구조가 이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방원과 정도전의 갈등 구
조라든가, 이어지는 이성계와 이방원의 갈등 구조가 그렇습니다. 도대
체 무엇이 이들의 갈등을 낳았을까요. 정도전과 이방원은 문과 무를 넘
나드는 재능을 공유했지요. 그런가 하면 이방원은 아들들 중 아버지 이
성계를 가장 닮은 아들이었지 않습니까. 바로 이 대등한 인물간의 각축
또는, 자신을 빼다박고 오히려 자신보다 뭔가 더욱 탁월한 아들을 향한
권력자의 이른바 근친 증오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입니다.
김=이성계가 볼 때는 이방원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자기가 가지고 있지 못하던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거지요. 말
하자면 방원에게 왕위를 주면 자기가 권력을 제대로 못 누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강=그것은 현대 정치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자가 후계자
를 선택할 때 자기보다 탁월한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자기를 닮았으면
서도 약간 못한 미니어처를 택할 것인가의 문제지요. 정도전과 이방원
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무장한 예언가'에 해당합니다. 고금에 국가 방
어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야 많지만 이들 모두 개국의 마음을 품거나
그것을 성사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언가처럼 내일의
비전을 가진 인물이라 해서 혼자만으로 왕조를 창업할 수도 없는 법이
지요. 창업에는 장군과 예언자가 만나야 하는데 이성계에겐 정도전이
있었죠. 그런데 정도전과 이방원은 한 인간 속에 장군적 요소와 예언가
적요소가 결합해 있는 정말 보기 드문 유형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김=이성계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고려를 이끌어온 정신
마저 죽였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고 보니까 이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
고… 민심이 떠나는 것을 느꼈겠지요. 결국 조선을 이끌어가는 기둥으
로 누구를 삼았는가, 바로 정도전입니다. 저는 박종화 선생의 조선일보
연재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을 언제 드라마로 만들까 고민했습니다. 특히
정도전에게 반했습니다.
강=정도전은 친원 외교에 관한 비판적 상소를 했다 해서 미움을 받
아 나주 봉화 삼봉 등으로 떠돌았지요. 나중에는 삼각산에서 연 서당도
탄압받았을 정도였고요. 말하자면 체제 지식인에서, 반체제 지식인으로,
다시 체제 지식인으로 돌아간 것 아닙니까. 권력 밖에서 설움을 느꼈던
사람이 권력 안으로 다시 들어갔을 때 권력을 보는 눈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정도전이 30대였던 나주 유배 시절 울분을 품고 동북
면 사령관인 이성계를 만나러 갔다가 "고금에 생사란 단 한번 있을 뿐"
이라는 사생관이 명확한시 한수를 나무에 적어놓았다는 일화가 전해지
지 않습니까. 그런 걸로 보면 실록에 실린 정도전의 마지막 장면은 믿
기가 힘들지요. 그런 인물이 마지막에 장독 뒤에서 살려 달라고 할 수
는 없는 법 아닙니까.
김=저도 그것이 아주 불만이었습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드라마에
서는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정도전 역의 김흥기에게 말한
것이 "결코 비굴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강=김 선생님은 모든 쿠데타는 악이다. 이렇게 규정하시는 것 같습
니다만 사실은 이성계의 쿠데타를 부패하고 무능하고 기운이 다한 고려
왕조가 불러온 필연적 역성 혁명으로 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물론 처
참한 살륙이 되풀이된 권력 탈취극이라는 비난은 면할 수가 없긴 하죠.
김=이성계가 유혈 혁명을 통해 왕을 도륙하면서 국가를 세운 것에
동의하기 힘든 것입니다.
● 측근들 의리는 요즘 `줄서기'와는 달라.
강=역사를 보는 눈의 높이 때문 아닙니까. 비행기에서 보면 지상의
인간은 개미처럼 보일 뿐 인간의 표정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가 하면
한옥의 용마루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시대를 이끄는 영웅도 보이고 그뒤
를 따르는 민중의 모습도 눈에 들어 옵니다. 그러나 땅바닥에 내려서
보면 민중만 보이고 시대를 이끄는 지도자란 소멸돼버리고 맙니다. 결
국 드라마를 찍는 데 가장 적절한 역사를 보는 눈높이는 한옥의 용마루
정도가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영웅과 그 영웅의 시대를 살던 민중의 얼
굴표정이 함께 살아나는 그런 높이지요.
김=우리 역사를 보면 그안에 현실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주
방송분을 보면 "진법 훈련 다시 하자"는 것이거든요. 결국 정도전의 정
치적 텍스트를 이방원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박정희는 쿠데타
한 뒤 민주당의 경제개발 정책을 받아들여 고속도로도 짓고 했습니다.
또 이성계가 배불숭유한 것은 집권하고 나니 돈이 없었고 그래서 불교
땅뺏어서 논공행상한 것입니다.
강=이제 이방원에 대한 평가를 해보죠. 동아시아에 당, 원, 청 등
시대와 나라를 달리 해서 여러 태종이 있었지 않습니까. 태종이란 칭호
는 어느 나라에서든지 왕조의 기반을 대대적으로 확충한 임금들에게 붙
이는 게 관례인데 저는 여러 태종 가운데 조선의 태종 이방원이 가장
탁월하다고 봅니다.
당 태종 이세민도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상왕으로 밀어낸 집권과
정이 이방원과 흡사하고 내치와 외치에 걸쳐 걸출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런 이세민이 이방원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후계자를 선택하
는데 결정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태종은 세 왕자 중에 자
식들의 능력을 꿰뚫어보고 수성의 재목으로 셋째인 충녕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당 태종은 여러 후계자 중 고종을 골랐고, 고종의 무능 때문에
측전무후의 득세와 왕권 찬탈을 자초했지 않습니까.
김=이방원은 자기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입니다.그
런데 이것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권근, 하륜, 민제 등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것 아닙니까. 기본적으로는 이것은 휴먼 릴레
이션이 아니고 자기 정책을 피우기 위해서 맺은 관계입니다. 방원 밑에
있던 사람들은 세자 때부터 '온리 원' 방원이었지요. 요즘 정치인들의
줄서기하고는 다릅니다.
강=정도전의 정치 사상 가운데 제왕론은 특히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이것은 '재택일상이요 재론일상'이라는 논리 즉, 군주의 권한은 재상을
뽑고 재상과 모든 것을 논의하는 데 한정돼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입헌군주주의, 한발 더 나아가보면 요즘의 내각책임제와도 비슷한 발
상이지요. 실권은 내각이 갖고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이걸
이방원이 받아들일 리가 없죠. 두 인간의 충돌이란 예정된 운명이랄 수
있습니다. 리더십의 유형으로 보아도 정도전은 논리의 정당성을 내세우
며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고 이방원의 리더십은 논리의 정당성만이 아니
라 여기에 인간적 매력을 보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종의 치세
과정을 보면 태종은 당초 기용했던 인물을 기용했다가 또 쉬게 하고 이
들을 다시 불러 쓰고…. 요즘 5·6년짜리 정권에 장관을 1백여명씩 갈
아치우는 현대의 최고통치자들의 용인술은 태종 발밑에도 가지 못할 정
도죠.
김=방원은 그것 때문에 살아남습니다. 또 하나 주변 인물들 중 친인
척도 많은데 그들은 방원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강=곧 '용의 눈물'도 친인척 부분으로 옮겨질 것 같습니다. 처남 민
무구 민무질 이 사약을 받고 그뿐 아니라 좀더 있으면 사적으로는 태종
의 사촌이요, 세종의 장인이 되는 사람까지 사약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충성을 다했던 가신들도 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귀양 처분을 받게 됩니
다. 이것은 태종이 권력이 부패하는 가장 핵심적 요소는 친인척의 비리
요,가신의 전횡이라고 보아 왕조 앞날을 위해 잡초를 뿌리 뽑겠다는 조
처라고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정말 리얼하게 만
들어서 다음 정권 출범일 날 재방영해 친인척과 가신의 발호를 엄계하
는 교양 프로그램으로 삼아야 하지않겠습니까. 드라마의 큰 흐름을 따
라가다 보면 주인공 중심으로 가기 쉬운데 극중에서 유성처럼 나타났다
스러져 가버린 인물 가운데 그 개성이 매력적이고 버리기 아까운 사람
을 고른다면 누구를 택하겠습니까.
김=이거이를 들 수 있습니다. 이방원과 사돈지간의 인척인 이거이는
방원의 등등한 권력 앞에서도 자기를 죽이지 않는 강한 개성의 인물입
니다. 방원의 사병 혁파는 요즘 말로 하면 군대의 사조직 이른바 하나
회 숙청과 같은 것인데 어쩌면 어제와 오늘이 이리도 똑같습니까.
강=현실의 정치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역사,
역사소설, 역사드라마는 패자로부터도 국민의 정신적 자산이 될 것을
추려내 물려주는 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용의 눈물'이
기여한 바 적지 않죠. 정도전만 해도 6백년을 거의 죽은 듯 지내다 다
시 대중 속에 숨쉬게 된 것이 '용의 눈물'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김=그렇지요. 권근이 이방원 등극 전 정몽주 신원 회복을 건의했을
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등극 후 신원 회복해주고 "내가
머리풀어 사과한다"고 합니다. 이방원은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나 합니다.
강=피비린내나는 긴박한 개국 과정에서는 정적을 너그럽게 신원 회
복하기는 힘들지요. 그렇지만 수성 과정에 들어가다 보면 국민의 마음
을 잡기 위해서라도 국민 통합을 위한 대사면 조처 같은 게 가능해지는
것아니겠습니까.
김=요즘 정치인들이 그런 것을 배우는 것 같아요.
강=요즘 정치인은 건망증이 심하지요.(웃음) 세종은 어떻게 그려갈
겁니까. 세종은 드라마에서 그리기 힘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김=지금까지는 세종은 정말 성군이라는 측면만 다루었습니다. 밥도
안먹고 똥도 안 누는 인물로 되어 있지요. 하지만 가정적으로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후궁이 20명도 넘고, 며느리 중 바람난 여자도 있고, 안질
도 걸렸고. 미화하려면 이런 건 감추어야 했던 것입니다.
강=세종대왕처럼 모든 면에서 탁월한 전인격적인 주인공을 있는 그
대로 그리면 그릴수록 사람들은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는 역설이 생겨나
지요. 이런 역설은 어떻게 풀어갈 생각입니까.
김=세종의 실제 측면은 이런 것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세종의 눈에
는 양녕이 가장 무서웠을 겁니다. 그래서 양녕에게 술과 계집에 대한
공양을 부단히 해서 딴 짓을 못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세종은 평화적
정권 교체를 했지만 그뒤를 보면 자기 형 둘을 제치고 왕권을 이어받은
것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권력 기반을 주변
에서 구하기보다 백성의 힘에서 찾으려 한 즉, 모든 권력 기반은 백성
에게서 나온다는 데모크라시를 6백년 전에 깨달은 사람 아니냐 하는 것
입니다.
강=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태조 태종 세종에게는 각각 다른 역사적
역할이 부여돼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태조와 태종 시기의 피비린내나는
권력상쟁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이 없었더라면 과연 세종의 치
세가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과연 "역사에는 공짜가 없다", "반
드시 대가를 치러야한다"는 말이 진실 같습니다. 역사의 가정법이긴합
니다만 조선 말엽인 1800년대에 다시 태종과 같은 철저한 리얼리스트
정치인이 태어났더라면 조선이 그렇게 허망하게 일본에 먹히는 일도 없
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조선 멸망 무렵의 임금에게는 태종이 동아시아
정세를 보았던 것과 같은 수준의 외교의 눈, 세계 정치를 보는 눈이 전
적으로 결여돼 있었습니다.
김='용의 눈물'이 너무 피를 흘리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종이라는 거대한 태양이 떠오릅니다. 나는 원래 이 위대
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싶었습니다.
강=이 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현실 정치인들이 '아류 이숙번', '아류
하륜'을 꿈꾸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김=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야 합니다. 정치인이 이 드라마를 보고 따라
하려한다면 바보 아니면 천치일겁니다.
강=지금 명퇴·조퇴 등에 시달리는 샐러리맨들은 간이 콩알만해져 있
습니다. 이 샐러리맨들을 야성의 공간으로 풀어놓아 주제를 들여다보면
서 호연지기를 기르게 하는 드라마가 아쉽습니다. 사극말고 현대를 무대
로하는 스케일 큰 남성적 드라마를 한번 해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김=작가가 문제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보여줘야 하
는데 이것을 소화할 작가를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일본의 정
신적 바탕이 된 조선통신사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 자긍심을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강=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통일신라에 이은 첫번째 민족 분열 시대였
던 후삼국 시절의 혼란과 갈등, 유혈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면서 이를 극
복해냈던 고려 태조 왕건의 국민 통합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드라마를 만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건 남북 분단 시대를 어떻게 극복하고 국민
통합을 다시 달성할 수 있는가. 이런 새로운 역사, 새로운 시대가 요구
하는 리더십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한번 해볼 만한 작업
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그렇지 않아도 앞으로 왕건을 드라마로 하려고 합니다. 왕건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건강이 유지된다면 김아무개가 고려 시대 전부를 드라
마로 훑고 지나간 연출가라는 평을 듣고 싶어요.
강=그러면 90세까지 연출을 계속하셔야겠군요.(다같이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