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장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⑥ ##.
"우리도 그들처럼 될 수 없을까?"
"벌써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된 것 같은데요. 나는 오늘 영문도 모르
고 정숙씨 아버님을 만났소. 집이나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아마는 정
숙씨의 상처같은…. 하지만 그 상처를 핥아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소.".
술보다는 자신이 돌연스럽게 멀어진 특이한 상황에 취해 인철이 그
렇게 받았다. 갑자기 그녀의 눈이 반짝하더니 쏘아붙이듯 말했다.
"야, 이인철. 너는 누구에게나 그런 촌티나는 어른 흉내를 내니?
뭐뭐했소, 뭐뭐한거요… 무슨 말투가 그래? 꼭 시골 아저씨들 같잖아.
그러지 말고 우리 말부터 트자. 그래야 허심이고 탄회고 뭐가 되지.".
여느때 같았으면 인철은 아마도 그녀의 그런 당돌함을 용서하기 어
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마음이 열린 뒤라서 그런지 그날은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좋지. 환갑전이면 다 갑장이지 뭐. 그래, 들고 있기 무거운데 콱
놓아버려. 말 놓으라구.".
인철이 조금 과장된 기분으로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다시 잔을 들
어 남은 것을 다 마시더니 그 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좋아. 그럼 시작하지. 너 좀 전에 그 아버지가 내 상처일지도 모
른다구 했지? 맞아 그런 적은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아냐."
"그런데 왜 우리 아버지가 아니고 '이' 아버지거나 '그' 아버지냐?".
"난 아버지가 둘이거든. 내가 본 그 아버지하고 대전에 있는, 아빠
라구 부르는 아버지 말이야."
"너를 다른 아이들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게 한 이유가 그거였어?".
"하지만 칙칙한 상상은 하지 마. 비극은 있어도 불륜은 없어. 그
비극 얘기를 해줄까?"
"네가 나를 여기 데려온 것이 그것 때문 아니었어?".
"하긴…. 그래 내 얘기할게. 나는 작년 이맘때까지 세상에서 아빠
엄마만큼 금슬좋고 행복한 부부는 이 세상에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
어. 나는 또 아빠만큼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도 이 세상에서는 없을거
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작년 4월에 네가 본 그 아버지가 나타났어. 전
부터내 주위를 맴돌다가 내가 대학에 입학한 걸 보고 나타난거야. 나
는 처음 그 아버지를 믿을 수가 없었어. 아니, 세상에 도대체 그런 일
이 있을 수가 없다고 믿었지."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야기는 다시 그 숱한 고약한 통속극의 배경이 되는 6·25로 돌
아가. 한쌍의 축복받은 연인이 있었지. 둘 다 유복한 집에서 자라 좋
은 교육을 받은 선남선녀였대. 별 어려움 없이 양가의 동의를 얻어 약
혼을 하고 결혼날짜를 잡았어. 그런데 결혼을 며칠 앞두고 6·25가 터
진거야. 남자는 집안의 명을 받들어 전선으로 가면서 가장 친한 친구
에게 약혼녀를 부탁했대. 그 친구는 처음에는 공연한 부탁으로 들었대.
왜냐 하면 남자의 집도 여자의집도 모두 번듯번듯해 자신이 그녀를 돌
볼 일이 없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래. 하지만 전쟁 앞에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오히려 방금 북한군이 물밀듯이 쳐내려오는데 자식을 전쟁
터로 몰아넣은 집이니 오죽 하겠어? 어쨌든 밀고 밀리고 하는 통에 두
집이 다 결딴나고 1·4후퇴 무렵에는 정말로 약혼녀 하나만 의지없이
남게 되고 말았대. 그것도 임신으로 배를 채독같이 해가지고."
"말이 씨가 된 모양이네.".
어쩌면 다음 전개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그
때문에 오히려 커지는 야릇한 궁금함을 인철은 그렇게 나타냈다. 그녀
가 잠깐 말을 멈추고 인철을 뜻없이 바라보다 다시 이었다.
"그런 셈이야. 마침 서울에 있던 친구는 그런 약혼녀를 부축해 피
난길에 올랐지. 약혼녀는 어렵게 오른 남행열차 지붕에서 진통을 시작
했고, 그 친구는 손수 그 아이를 받았어. 딸이었는데, 그게 바로 나래.
그 친구는 난산으로 늘어진 약혼녀와 갓난 핏덩이를 무사히 보호해 부
산으로 내려갔고…."
"그분이 바로 대전에 계신다는 네 아빠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