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0장 교두보에서⑦ ##.

깊은 정보다는 필요에 따른 결혼이었지만 명색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
께 있는데 아무 감정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러나 영희는 애써 침착을 가
장했다.

"다, 당신이 어, 어떻게 여길….".

이윽고 반쯤은 얼이 빠진 것같은 억만이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서 문이나 여세요.".

영희는 목소리를 더욱 차고 차분하게 가라앉혀 말했다.

"그, 그러지 뭐.".

억만도 더는 별 수가 없다는 듯 문을 열었다. 방안은 영희가 예상한
광경 그대로였다. 맥주병 몇개와 마른 안주 접시가 어지럽게 흩어진 방
한 구석에는 황급히 개어놓은 이불이 있었고, 그곁에는 역시 황급히 옷
을 걸친 듯한 젊은 아가씨가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겁먹은 눈길이나
화장이 지워져도 얼굴이 지저분하지 않는 것이 술집에 나온 지 오래되
지는 않은 아가씨 같았다.

"저, 아가씨, 자리 좀 비켜 주시겠어요?".

영희는 절로 그 아가씨의 머리께로 뻗어지는 두손을 억지로 등뒤에
붙인 채 예절바르게 말했다. 그게 오히려 겁나는지 아가씨가 몸까지 부
르르 떨며 영희를 바라보다가 겨우 말뜻을 알아듣고 황급하게 방을 나
갔다.

영희의 차분한 태도나 예절바른 말투에 더욱 질려하기는 억만도 마찬
가지였다. 평소 억만이 영희를 겁내온 것은 오히려 그녀의 거세고 억척
스런 성격쪽이었다. 영희는 그런 억만의 반응을 모르는 체 여전히 침착
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당신 정말로 왜 이러세요? 저 죽는 꼴 보시려고 이래요?".

영희가 한발 다가들며 호소하듯 그렇게 말하자 억만은 한팔을 들어
막는 시늉을 했다. 아마도 그는 영희의 차분함이 더 격렬한 공격을 준
비하고 있는 것으로 지레 짐작한 것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공격의 징후
가 보이지 않자 조금 마음이 놓이는지 느닷없이 변명조가 되었다.

"오, 오해하지마. 어제 내가 너무 심하게 마신 거같아. 정말로 누가
여기 데려다 준지도 모르고 잤다구. 아까 그 아가씨는 아침에 내가 어
떻게 되었나 보러온 거구….".

뻔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남자들이란 그보다 더한 현장에서 들켜
도 잡아떼기 마련이라는 것 또한 영희는 알고 있었고, 그녀 자신 그런
남자의 외박상대가 되어 실제로 경험해본 적도 있었다.

"좋아요. 남자가 바람 한번 핀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저두
과거가 깨끗한 년이 못되구…하지만 어쩌실 거예요? 앞으로 어떡하시
려구 이러세요?".

영희는 목구멍까지 치미는 욕설을 억지로 삼키며 목소리를 더욱 차
분하게해 호소하듯 물었다. 억만은 영희의 그같은 반응이 못미더우면
서도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끊임없이 돌출적인 공격에 대비하는 한
편 제법 남편의 권위를 내세워 설득조로 나오기도 했다.

"어찌하긴 어찌해? 뭐, 내가 집을 나오기라도 했어? 집안 살림을 말
아먹었어? 어쩌다 친구들 만나 술한잔 먹고 하룻밤 외박한 거 가지구
너무 심각하게 나오지 말라구.".

그러는 억만의 천연덕스런 얼굴을 보며 영희는 이 새끼 따귀를 한대
후려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었으나 다시 꾹꾹 눌러 참았다. 아직은 아
니다. 내가 좀 더 자리를 잡은 뒤에…. 하지만 그렇게 참아야 하는 자
신이 갑자기 처량해지면서 영희의 다음 연기를 훨씬 수월하게 해주었
다. 문득 치솟는 눈물에 목소리까지 울먹이면서 영희가 그런 억만에게
매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