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중은행 임원에게 얼마전 한 기업인이 접근해왔다.

"금리 4%짜리 거액이 있는데, 쓸 곳을 알아봐주겠느냐"는 제의였다.

은행 임원이 "아! 또 그 괴자금 얘기구나…"고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는
순간, 그 기업인은 갑자기 "동남아 화교들의 돈이 갈 곳이 없나봐요"라
고 덧붙였다.

'괴자금'이란 지난 몇년동안 재계에 나돌았던 장기저리의 거액 사
채자금을 말한다. 전직대통령이 쓰고 남은 비자금이라는 해석도 있었
고, '통일대비용 비축자금'이라는 그럴듯한 설명도 있었다.

괴자금은 시중 자금난이 가중될 때마다, 중견그룹 부도위기설이 나
돌 때마다 극성을 부리며 떠돌아 자금시장이 자주 출렁이곤 했다. 하지
만 이번에는 '해외판 괴자금'이 들어왔다는 얘기가 재계와 금융가에 나돌
고 있다. 해외판 괴자금이란 한마디로 외국의 값싼 자금(현금차관)을
들여와 국내 대기업들에 대줄 수 있다는 메시지다.

현대전자가 거액의 현금차관 성격의 돈을 들여오다가 들통난 사고
도 이같은 움직임의 일단을 반영한다는 게 은행가의 해석이다. 대재벌
들이 편법으로 해외에서 돈을 빌려 국내에 들여오고 있는 사실은, 이미
은행가에선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 은행임원은 "시중은행 국제담당 임원치고, 대기업으로부터 외국
인 투자를 가장한 현금차관 도입 제의를 안받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경원 실무자들은 "올해 외국인 투자금액중 절반 이상이 변칙 현
금차관일 것"이라고 실토했다. 얼마전 모재벌 총수는 부실 계열사 회생
책으로 "화교 자본을 대거 끌어오겠다"고 공언했다. 또 부도직전에 몰
린 어느 재벌그룹은 "수천억원의 홍콩자본을 들여 오려고 협상중"이라고
언론에 흘리기도 했다.

그만큼 외국돈을 쉽게 들여올수 있다는 인식이 요즘 우리 재계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현금차관이 많이 들어오면 통화
량이 크게 증가, 물가불안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현금차관 도입을 원칙적
으로 금지시키고 있다.

이 정책을 언제까지 계속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논란은 남아있다.
무역 적자가 크고, 재벌의 연쇄 부도로 해외차입이 극도로 위축됐으므로,
다소 편법이 있더라도 달러가 국내에 유입되는 것을 굳이 막을 이유가 없
다는 옹호론도 나온다.

이 때문에 정부는 재벌 기업들의 현금차관 도입을 무작정 금지시킬
것이 아니라, 뭔가 단계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할 때가 왔다. 다만 그
때까지 재벌 기업들은 탈법적이고, 변칙적인 차관도입 행위를 삼가야 할것이다.< 김재호 · 경제과학부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