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껍질 벗기기에서 수박 자르기로.

90년대 들어 체험기나 문화-풍습 소개차원에서 처음 불이 붙기 시작
한 일본 관련 출판붐은 이제 일본 지성계의 핵심논의 구조에 과감하게
뛰어드는 저술로 확대되고 있다.

일본인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물 '로마인 이야기'(한길사)는
고급 일본저술의 한국진출을 본격적으로 열어제쳤다. 이 책은 장대한
스케일과 생생한 역사서술로 특히 30∼40대 회사원을 비롯한 남성독자
들의 관심을 끌었다. 국내에 소개된 그녀의 저작은 5권까지 나온 '로마
인 이야기'를 비롯, '남자들에게' '바다의 도시이야기'(전2권)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 어록' '르네상스의 여인들' '체사레 보
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신의 대리인' 등 13권에 달하며 지금까지 모
두 95만부가 팔려나가 1백만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사료적 정밀
성과 소설적 재미를 동시에 갖춘 그녀의 저작은 '시오노식 역사서술'이
란 말이 생길 정도로 우리 독자와 출판계에 영향을 끼쳤다. 최근 나온
이누카이 미치코의 '성서 이야기'(한길사)도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전
달하는 시오노식 서술방식을 연상시킨다.

한림대 한림과학원 일본학연구소(소장 지명관)가 기획한 '일본학 총
서'는 정치 사회 역사 문화 등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자가진단이다.
현재 28권까지 나온 이 총서는 일본문화의 원형에 관한 토론을 담은 가
토슈이치 외 지음 '일본문화의 숨은 형', 전후 일본의 사회의식과 문화
흐름을 분석한 쓰루미 슐스케 지음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 일본식 경
제의 신화와 현실을 진단한 오다카 구니오 도쿄대 명예교수의 '일본적
경영' 등 일본인의 의식과 인간관계, 기업과 국가경영을 두루 포괄하고
있다.

일본학계에서 '마루야마 텐노(천황)'로 불리는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한길사)과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
(통나무)는 일본 근대국가 성립과 사상변화를 '근대화'의 논리로 꿰뚫
은 명저로 알려져 있다. 민음사의 '일본의 현대지성'시리즈 첫째권으로
나온 일본의 대표적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
원'도 문학을 통해 일본 근대성의 성립을 고찰했다. 이 책은 서양 문단
에 수출된 일본 비평집 1호이기도 하다.

현대 일본 지성계의 쟁점중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보편성을 갖춘
저작을 소개하는 이 시리즈 목록에는 이마무라 히토시의 '근대성의 구
조', 야마구치 마사오의 '문화와 양의성', 요시모토 도시아키의 '매스
이미지론',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의 신화학' 등 철학-인류학-문학-
영화저작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 이와나미(암파)서점의 '21세기 문제군 시리즈'(푸른숲)는 현대
사회의 현안진단과 이를 바탕으로 21세기를 전망하는 기획. 시리즈 1차
분으로 나카무라 유지로의 '21세기 문제군-인류는 어디로 가는가', 사
와 타카미츠 게이토대 경제연구소장의 '자본주의의 재정의', 사에키 케
이시 교토대교수의 '이데올로기와 탈이데올로기'등이 선보였다.

순수문학은 최근 완간된 '20세기 일문학의 발견'(전12권·웅진출판)
과 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 소설문학 전집'(전24권·
고려원)이 돋보인다. '20세기 일문학의 발견'은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
가와 류노스케, 미야자와 겐지,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자이 오사무, 미
시마 유키오, 무라카미 류 등 현대 일본문학의 큰 줄기를 형성한 작가
12명의 대표작을 선정했다. 14권까지 나온 '오에 겐자부로 전집'은 인
간의 구원 등 인류의 보편적 주제를 다룬 점에서 우리 문학에도 많은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한양대 윤상인 교수(일문학)는 "일본 지성계를 움직이는 저작들의
본격 소개는 우리보다 앞서 서구 근대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현재 우리
와 비슷한 고뇌를 하고 있는 일본 지성인들을 한국의 지성논쟁 테이블
에 적극 초대하는 작업"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