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기 드문 대화 부부" 주위서도 발 굴러 ##.


"얼마나 대화가 많으시던지요. 단둘이 저녁을 드실 때도 얘기꽃을 피
우느라 식사 시간이 1시간 반에서 2시간은 걸렸어요. 그런 분들이 헤어
지시다니…." 서울 광장동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68) 자택을 지키던 집
사는 회장 부부 사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폐암에 걸린 남편을 간호하다 숨진 최 회장의 부인 박계희(63) 여사
의 순애보가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최 회장이 폐암 진단을 받는
것은 지난 5월 말. 6월 초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지난 6월16일 세계적인
암치료기관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헌
신적으로 남편을 돌보던 아내가 이틀 후인 18일 그만 숨지고 말았다. 박
여사는 이날 남편의 수술 경과를 확인한 후 숙소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
였는데 숨진 채 발견됐다고 한다. 남편의 암 선고 후 큰 충격을 받은 그
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간병하다 지병인 심장병과 과로가 겹쳐
쓰러진 것이다. 박 여사의 영결식은 미국(6월24일)과 한국(28일) 두 번
에 걸쳐 치러진다.

최 회장은 직접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이생에서 아내의 마지막 길을 차
근차근 준비했다. 20여년 부부가 함께 산 워커힐 빌라 자택에 빈소를 차
릴것, 미술 기획자로서 박 여사의 꿈이 묻힌 워커힐 미술관에서 노제를
지낼 것, 결혼해서 귀국한 후 두 사람이 처음 찾은 수원 생가에 들를 것
을 병상에서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엄마는 어디 갔느냐"고 묻는 최 회장에게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은
한동안 박 여사의 죽음을 알리지 못했다고 한다. 수술 직후 지나친 충격
을 받을까봐서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장남 태원씨가 아버지에게 알렸고,
최 회장은한동안 아무말도 못했다고 한다. 최종현 회장 부부는 유별나게
사이가 좋은 것으로 유명했다. 웬만하면 저녁은 집에서 들었고, 주말에
는 아들 딸 손자 손녀까지 불러들여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고 한다. 그래서 최 회장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집에서 만든 된장찌개
김치찌개다. 부부는 오전 시간을 거의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일상 업무는
전문 경영인에게 위임하고, 21세기 대비 전략 등 중요한 것만 챙기는 최
회장은 일부러 점심 시간이 돼서야 회사에 나타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와 함께 스포츠 센터에 가거나 가까운 아차산에 오르고, 마주보며
단전 호흡을 하는 게 일과였다. 점심 때쯤 최 회장을 출근시킨 후 박 여
사도 자신의 직장인 워커힐 호텔 안 워커힐 미술관을 찾았다.

외동딸까지 결혼시켜 부부 단둘이 남게 된 후로는 최 회장이 "휑뎅그
렁한 집에 아내 혼자 남겨두기가 안됐다"며 출장 때마다 박 여사와 동행
했다. 1984년 워커힐 미술관 설립 후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박 여사는 어
느나라에 가나 박물관과 미술관부터 찾았고, 도록이나 자료를 수북히 안
고 돌아왔다. 실제 그곳에서 눈여겨봤던 전시회를 한국으로 유치하기도
했다. 워낙 돈벌이가 아니라 문화 사업으로 시작한 일이라 워커힐 미술
관은 그림 판매나 중개는 일절 하지 않는다. 대신 문화의 폭을 넓히는
전위적인 기획에 중점을 두고 있다. 박 여사는 미술관 외 회사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선경 사람들은 "회장 부인이 누군지 얼굴도 제대
로 보지 못했다"고 한다.

박계희 여사를 아는 사람들은 "첫인상은 차가운 듯했지만 알고보면
그렇게 너그럽고 자상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40㎏가 넘을까말까
하는 마른 체격이라 날카로워 보이지만 사귀고 나면 누구든 편안한 느낌
을 받는다고한다. 최 회장 부부 모두가 집안이나 옷차림이나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싫어하는 소탈하고 검소한 성품으로도 유명하다. 외제품
은 찾아보기 힘들정도였다. 이들은 전적으로 자녀들 결정에 따라 결혼시
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남 태원씨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소영씨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권력자의 딸이라는 것 때문에 오히려 꺼렸다고 한
다. 차남은 여동생 친구와 막내딸은 오빠 소개로 만난 회사원과 연애 결
혼했다. 박 여사는 "우리집안 전통이 연애 결혼 아니냐"며 부부는 무엇
보다 대화가 통해야 한다고 자녀들에게 강조해왔다.

최종현 회장과 박계희 여사의 만남 자체가 이렇게 '뜻 맞는 사람간의
결합'이었다. 자유당 시절 해운공사 사장을 지낸 박경직씨의 넷째 딸이
었던 박계희씨는 54년 경기여고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떠났다. 시카고 아
트스쿨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그는 기숙사 축제에서 시카고대 대학원 경
제과 학생이었던 최 회장을 만났다. 최 회장이 먼저 저녁 식사를 하자고
제의했고, 두 사람은 1년간 사귀다 60년 3월 시카고대 근처 교회에서 결
혼식을 올렸다.

약하고 섬세한 여성과 축구선수 같이 건장한 체격에 무뚝뚝한 다혈질
의 사나이. 두 사람은 그러나 이렇게 다른 점을 서로 보완하며 살아왔다
고 주변 사람들은 전한다. 두 사람은 학교 근처 아파트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번갈아 밥을 짓던 학생 부부 생활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만도 힘들었던 박 여사가 학업을 중단했기 때문이
다. 한국에서 부쳐오는 돈이 충분치 않아 최 회장은 골프장 캐디, 박 여
사는 아이를 등에 업고 교포 상대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미국 유학
까지 와서 공부를 포기한다는 게 쉬운 건 아니었지만 "나만 믿고 따라오
라.

나는 거목이 될테니. 그 그늘에 숨어 있기만 하면 된다"는 남편 말에
그만 넘어갔다고 한다. 62년 최 회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님 사업
도 기울자 귀국, 선경직물 부사장에 앉아 가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시절 박 여사는 경제인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았다.

박 여사가 자기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은 아이들을 웬만큼 키워놓은 40
대 초반부터 였다. 최 회장이 "당신이 공부하면 나도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겠다"고 부추겨 동양사 공부를 시작했다. 한학의 대가인 임창순 선
생에게 몇년 동안 사사를 받고 한문장학회 일을 돕기도 했다. 워커힐 미
술관은 남편이 25년 전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난 바쁜 사람이니 당신
에게 조그만 화실을 하나 지어주겠다"고 한 약속을 한참 후에 지킨 것이
다. 워커힐 미술관 직원들은 박계희 여사에 대해 "늘 공부하는 분이었다"
고 회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