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길위의 혼 ⑫ ##.
집을 나온 인철이 홀로 헤쳐가야하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처음 실감
한 것은 부산에 떨어진지 닷새만의 일이었다. 몇푼 안되는 돈마저 떨어
져 저녁도 굶고 역 대합실로 향하면서 그는 비로소 자기 앞에 펼쳐진 삶
의 가혹한 진상을 섬뜩한 공포로 바라보았다. 서울을 떠날 때 은근히 가
슴까지 설레며 떠올렸던 상상들은 결국 미문으로 과장된 방랑소설 또는
풍요한 사회를 배경으로 한 서구의 성장소설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단정되었다.
그 며칠 인철은 먼저 기차간에서 만난 묘한 길동무 달근이 가르쳐준
요령대로 일자리를 구해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찾아오는
낯선 일꾼에 대해 알지 못할 불신을 품는 경향이 있었다. 틀림없이 일꾼
이 필요한 듯한데도 인철이 찾아가면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하기 일쑤였
다.
직업소개소도 인철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겨우 산업화의
문턱을 넘고있던 60년대 중반의 이 사회는 그리 다양한 일자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아직 만으로 열여덟이 차지 않은 인철의
나이는 알맞는 일자리를 찾기 더욱 어렵게 했다.
이도 저도 안돼 맥이 빠질 때 인철은 용두산 공원이나 광복동거리를
배회하며 막연한 행운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불치의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성취를 물려줄 착하고 똑똑한 젊은이를 찾는 노신사도,
초라하지만 비범한 인철의 행색을 알아보고 자식삼아 데려다 기르려는
귀부인도 없었다. 한군데 조금이라도 오래 머뭇거리면 의심쩍어하는 눈
빛만 번쩍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인철에게는 극한적인 상황으로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행운은 있었다. 엿새째 되던날 자신의 마지막 재산인 책가방을 몇푼의
돈으로 바꾸기위해 남부민동의 헌책방을 찾았을 때였다. 쓰던 교과서와
참고서 몇권에 영어사전까지 내놓자 중년의 주인이 힐끗 인철을 살피며
물었다.
"학생인가 본데 이렇게 몽땅 팔아버리고 공부는 어쩔려고 그래?"
"다 끝났어요. 우선 살고봐야죠. 공부는 다시 여유가 생기면 하는거
구요.".
무슨 기대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너무 굶주리고 지쳐있어 자신도 모르
게 드러낸 솔직함이었다. 책방주인은 거기서 어떤 흥미를 느꼈던지 인철
의 신상을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종의 방심에 빠진 인철
이 여전히 솔직하게 자신을 털어놓자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래? 그럼 우리 책방에서 일해보는게 어때? 지금은 좀 한가하지만
신학기 앞뒤로 한달은 눈알이 팽팽 돌아갈 지경이지. 두어달 앞당긴 셈
치고 점원으로 쓸테니 생각있으면 여기서 일해봐.".
그말에 인철은 앞뒤없이 눈물부터 쏟아졌다. 그 며칠 거지가 되어 구
걸하며 거리를 떠도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소스라칠 만큼 불안과 초
조에 시달린 뒤끝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민망스러우리만치 굵고 뜨거운
눈물이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고맙…….".
인철이 눈물을 훔치면서 그렇게 말끝을 삼키자 주인은 문득 사무적인
목소리가 되어 근무조건을 일러주었다.
"잠은 가게 문닫은 뒤 야전침대 펴구 자고, 식사는 저 앞 국밥집에서
갖다 줄거야. 월급은 없고 신학기 되면 잡비조로 얼마간 주지. 일하는거
보아가며 말이야.".
따지고 보면 결코 좋은 일자리는 못되었으나 그때의 인철에게는 지옥
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만큼이나 고맙고 기뻤다. 무슨 인연에 끌려 인철
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나 갈수록 의심많고 인색한 상인의 본색을 드러
내는 것은 오히려 주인남자 쪽이었다.
"단 신원을 보증해줄 사람이 있어야 해. 이 책방 보기에는 허름해도
내 전재산이야. 이걸 아무 보증 없이는 맡길 수 없지.".
그렇게 충족시켜주기 어려운 조건을 느닷없이 내걸었다가 다시 인철
의 막막해하는 눈물을 보고서야 그 조건을 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