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동물 이야기」,보르헤스 외 지음, 남진희 옮김).

『형용할 길 없는 아이러니와 함께/신은 내게 책들과 밤을 동시에
주었다.』.

금세기 중남미가 낳은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자신을 박해하던 페론 정권이 무너지고 새로 들어선 정부
가 자신을 국립도서관장에 임명하자 이렇게 노래했다. 세상을 거대한
도서관에 비유하기를 즐겨했던 그는 당시 이미 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책들의 미로에 둘러싸인채 그는 인생의 황혼기에야 찾아온
명성과 영예를 초연하게 누렸다.

그리하여 사르트르와 함께 보르헤스는 지독한 책벌레이면서 그 벌
로 시각적 어둠 속에서 만년을 보내야 했던 운명의 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시성 호메로스가 그렇듯이 외적 눈을 상
실한 그는 내면의 눈을 통해 보통사람들이 갖지 못한 통찰력과 투시
력을 보여 주었고, 또 이를 아름답고 농축된 언어에 담아냈다.

그가 남긴 여러 권의 작품집 가운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은 시
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산문집이라
하기에도 어려운 「상상동물 이야기」(까치간)라는 책이다. 보르헤스가
마르가리타 게레로와 함께 저술한 이 책은 형이상학적 유희와 백과사
전적 인용으로 가득찬 보르헤스 특유의 글쓰기에 지친 사람에게 잠시
숨돌릴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인류가 상상해낸 갖가지 환상적인 동물들을
소개하고 간략한 평가를 곁들이고 있다.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에 등
장하는 신화적 동물들은 물론이고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이나 중국
일본의 민간전승에 나오는 괴물들과 신령스러운 존재들에 이르기까지
저자들은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상상력의 만화경을 뒤따르고 있다. 당
연히 그리스 로마 신화나 「아라비안 나이트」도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
고 있으며, 카프카나 에드거 앨런포, C S루이스같은 작가들도 상상동
물학의 주요 구성원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용이나 봉황, 일각수,
불도마뱀 살라만드라, 그리핀, 켄타우로스,사이렌 등 어느 정도 익숙
한 이름들도 보이고 반시나 하르피아, 호치간 같은 낯선 존재들도 귀
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이들 기상천외한 동물의 생김새와 유래에 대한 설명을 읽다보면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점차 흐려져 나중엔 리얼리티라는것 자체가 의
심스러워지는 지경에 이른다. 즉 이 책에 나오는 동물들은 불가해한
우주에 맞서 인간이 상상해낸 또다른 불가해한 존재들의 목록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시간 속에서 모든 존재는 환영이며 실재와 가공 사
이에 거리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예컨대 고대 중국에서는 거울 속의 세계와 인간 세계가 지금처럼
단절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왕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날
거울속의 사람들이 인간들을 공격해옴에 따라 평화가 깨졌다. 그래서
황제는 침략자들을 몰아내 거울속에 가두고 그들을 인간과 사물에 종
속된 단순한 그림자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도 거울 속의 존재들은 언
젠가 이 신비한 동면상태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거울, 꿈, 분신 등과 관련해서 무한한 상념에
잠기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기기묘묘한 존재들에 대한 이야
기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스웨덴의 신비주의적 철학자 스웨덴보리의
천사에 대한 언급이었다. 『지상에서 서로 사랑한 두사람은 하나의 천
사가 된다. 천사들의 세계는 사랑으로 다스려진다.』 사랑에 대한, 사
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