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이로 올해 70세인 신니콜라이화백(한국명·신순남)은 지금
까지 모두 세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타쉬켄트 미술대학 졸업(1960년)을
기점으로 삼으면 창작생활 30년이 넘는데도 3회의 개인전 밖에 갖지 못
했다면 결코 화려한 경력은 되지못한다. 오히려 「불행한 화가」라는 표
현이 적합하다. 이는 신화백이 창작 활동을 게을리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체험한 「한민족유민사」를 반드시 기록화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던 그는 누구보다도 작업에 열정을 쏟았다.
타쉬켄트시 세브자에 있는 그의 화실에는 더이상 쌓아둘 데가 없을
만큼 빼곡이 작품이 차 있어,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이렇게 많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을까 경탄할 정도로 작업량이 대단하다.
그럼에도 회갑이 되도록 개인전 기회를 얻지못한 것은 그가 고려인
인데다그의 그림을 「민족주의」 「형식주의」라고 비판해온 소련당국과 미술
계가 전시장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57년 모스크바 세계청소년축제에서 금상, 우즈벡공화국 청소년화가
축전에서 2등상을 수상한 신화백은 제자인 바하디르 자랄로프(소련 국가
상 수상자이자 우즈벡 화가동맹위원장)의 도움으로 78년 우즈벡공훈미술
가 칭호까지 받았으나 작품을 발표할 기회는 좀체로 주어지지 않았다.
신니콜라이가 화가로서 알려진 것은 85년 우즈벡미술관에서 개최된
즉흥전시회(그룹전)에서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기억의 길(레퀴엠-
한민족유민사)」의 일부를 발표했다. 신화백은 이 작품으로 소련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90년 6월, 신니콜라이화백은 평생 고대하던 첫 개인전을 당시 소련
의 수도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미술관에서 가졌다. 그의 나이 만62세때
였다. 신화백은 수십년간 창작한 작품의 극히 일부만을 출품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장의 규모도 충분치 못했을 뿐 아니라 관람객들이 이해할
수있는 작품만을 골라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완성한 22부작 「레
퀴엠(진혼곡)-한민족유민사」도 일부밖에 선보이지 못했다.
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
할 수 밖에 없었던 고려인들의 슬픔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빛나는 색채
와 상징적인 기법으로 강압과 죽음을 대조시켰다」는 평을 얻었다.
러시아의 한 미술평론가는 그의 작품을 보고 「우리의 우주 전체가
울고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며 「영혼을 묘사한 그림」이라고 격찬했다.
첫 발표전을 통해 우즈벡의 고려인화가 「신」은 소련 전역은 물론
유럽과 미국에까지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91년 신화백은 제2의 고향
이라고 할 수 있는 우즈벡의 타쉬켄트 국립미술관에서 2회전을 가졌다.
그리고 95년 같은 장소에서 3회전을 가졌다. 이 두번의 전시회
에도 그는 모스크바전때 선보였던 「레퀴엠-한민족유민사」의 일부와 「기도」
「어머니와 딸」등 37년 비극 주제의 작품을 발표했다. 「부채」연작과 「전
설」시리즈의 부분도 공개했다. 우즈벡의 산촌인 수코크를 주제로 그린
밝고 경쾌한 풍경들도 새로이 선보였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을 테마로 전체주의
제도와 스탈린 탄압의 희생자를 작품에 형상화한 신화백의 작품을 본 우
즈벡과 카자흐스탄의 카레이스키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인 평론가 이바체슬라브씨는 95년 7월1일자 「고려일보」에 실은
「일생과 4년」이란 리뷰에서 『신화백의 대작 「한민족유민사」에는 우리 조
상의 눈물, 그리고 민족의 슬픈노래가 들리는듯 하다』며 『저들이 우리의
할아버지, 부모님께 행한 만행은 결코 용서할수 없을 것』이라고역설했다.
그는 이 평문의 말미에서 『신화백의 작품은 그의 것만이 아닌 우리
와 우리 후손들에게 돌려주어야할 보물과 같다. 우리로서는 CIS(독립국가
연합)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의 역사, 예술 및 문화는 항상 남아야 한다
고 본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우리는 세번째 개인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타쉬켄트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3회전의 스폰서는 중앙아시아-미국기업기금(ASA·
The CentralAsian American Enterprise Fund)이다.
모스크바전(90년)과 타쉬켄트전(91년)을 통해 신니콜라이는 구미의
미술전문가들로부터 「우리시대의 시켈로스(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화가)」
「금세기의 탁월한 모뉴멘털리스트(기념화가)」라는 찬사를 모았다.
ASA가 3회전 스폰서를 맡은 저변에는 신화백의 작품을 미국에 전시
하고 매입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파리의 화상도,
의 화상도 「니콜라이 신」의 작품에 잔뜩 눈독을 들였다. 하늘의
뜻이었을까. 이런 찰나에 신순남의 작품이 한국인의 눈에 뒤늦게 발견
됐다.
95년의 3회전을 본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소장이 신화백의 작품
을 본 후 『이 작품은 꼭 한국에서 전시해야 한다』며 한국정부에 이 작가
를 소개, (관장 )과 사가 뜻을 합쳐 한국전
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윤기 소장은 『그때 이 작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의 작품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을 것』이라며 『정말 천우신조』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화백은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미술관이나 타쉬켄트
국립미술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겠다고 제의했지만, 내 작품들은 한국인들
에게 보여주고 싶었을뿐 아니라 한국에 남기기 위해 이런 제의를 모두 거
절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신화백의 의지로 한국인들은 「한민족 유민사」를 비롯한 대형
연작 모두를, 그것도 일부가 아닌 전작을 최초로 보는 행운을 안게됐다.
<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