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마오쩌둥)은 국가안전과 세계 혁명화를 외교목표로 삼은 반
면, 등소평(덩샤오핑)은 평화와 경제발전을 위한 개방전략을 추구했다.
모는 2차대전의 와중에 건국과 영토보전에 몰두한 데 비해, 등은 경제
발전을 위한 주변정세 안정을 추구한 셈이다.

모는 당초 미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제국간의 중간지대에서 반미투쟁
의 바람을 일으켜, 미국을 고립화시킨다는 전략을 택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제3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추구했으나, 문화혁명으로 10년여의 외
교공백을 만들었다. 후반기에는 등과 교관화(차오관화)를 통해 미소등
제1세계와 동-서구 및 제3세계간의 대립을 조장하는 분열전략을 동원
했다.

등도 78년 복권초기에는 제3세계의 단결을 통한 미소 등 초강대국
견제에 주력했다. 특히 78∼84년중에는 월남의 침공과 소련
의 아프간 침공 등에 자극받아 소련의 남하정책을 계속 견제했다. 이
후 제3세계내 외교기반을 발판으로, 미국과의 협력을 통한 소련 견제
로 노선을 수정했고, 89년부터는 미소 갈등을 틈 탄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과 외교 및 무역의 동반확대를 추구했다. 집권 말기에는 외교
를 통해 국가안전과 경제이익을 도모하는데 치중했다.

군사정책에서도 모와 등은 상당한 대조를 보였다. 항일유격전과 국
공 내전속에서 성장한 모는 69년의 중소간 국경충돌에 자극, 국민총
생산의 10%를 탱크와 전투기 생산에 투입하는 등 해방군 전력강화에
무게를 실었다. 동시에 2류 군사대국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64년 원
폭 개발에 성공했고, 이어 핵미사일과 수폭 개발도 60년대에 완료했다.

이에 비해 등은 85년부터 군구를 대폭 조정, 해방군의 살빼기에 주
력했다. 대신 그는 1-2세대 대륙간 미사일 개발과 핵잠수함 건조, 해
군의 대양함대화 등 군현대화 작업으로 전력 감축을 보완했다. 등은
또 문혁을 교훈삼아, 해방군을 당의 군대에서 국민의 군대로 바꾸려
노력했다. 그에 따라 군의 정치개입을 줄이기는 했으나, 89년 천안문
사태진압에 30만 병력을 동원해 정치 군인을 양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