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의 장막 열어젖힌 `작은 황제'...`제2 대장정' 지휘 ###.
「북경=박승준기자」 19일 93세를 일기로 숨진 등소평(덩샤오핑)은 중
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49년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모택동(마오
쩌둥),화국봉(화구오펑)에 이은 세번째 통치자였던 등소평. 그는 지난
78년 권력을 잡은 뒤 18세기 산업혁명이후 최대의 경제사적 이벤트란 중
국의 경제기적을 연출해낸 「개혁의 설계사」였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유명한 개혁론을
펼친비전의 지도자 등이 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죽의 장막」에 가렸던
가난한 중국이었다. 그는 이 대나무 커튼을 열어젖히고 중국의 사회주의
에 자본주의적인 요소와 부를 접목시키는 「제2의 대장정」을 이끌어 냈다.
모는 물론, 중국의 역대 황제가 이루지 못한 먹는 문제를 해결한 등은
「5척단구의 거인」이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 두차례(78년과 85년)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것은 등의 이같은 공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결과였다.
등은 1904년 8월 22일 중국 남부 사천성(쓰촨성) 광안현 협흥향의 패
방촌이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쓰촨성의 성도에서 성도법
정학교를 나온 청말(청말)의 인텔리였으며,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사망,
등은 계모밑에서 자랐다.
등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1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에서였다. 16세
에 파리 유학을 떠난 그는 당시 프랑스에 전해진 러시아 10월혁명의 열
기에 사로 잡혔다. 등이 확고한 공산주의자로 변신해 귀국한 것은 23세
때인 1929년.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제1차 국공합작이 막 깨지려던 참
이었다. 그는 당의 지시에 따라 서안에서 한구로, 다시 남녕-상해(상하
이)로 무대를 옮겨가며 중공당조직의 확대, 무장봉기주도 등 맹활약을
했다. 이런 공로로 등은 대장정의 초기인 1934년 이미 당중앙비서장이
되어있었다.
이후 등은 37년부터 시작된 중일 전쟁기간동안 이름을 날린 팔로군
129사단의 정치위원을 거쳐 52세 때인 56년의 중공당 중앙위 전체회의에
서 모택동, 주은래, 유소기(유사오지) 등과 함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이후 75년 당부주석 겸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78년에는 모가 지명한
후계자 화국봉을 제치고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됐다. 모택동이 『저 작은
동지를 과소평가하지 말라. 그 앞에는 위대한 미래가 있다』고 흐루시초
프에 말한 지 21년만의 일이었다.
등에게는 그러나, 정상으로 가는 길에서 3번의 큰 정치적 좌절이 있
었다.
33년 강서성당서기 당시 모노선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당에서 추방당
했으며, 66년에 시작된 문화혁명의 회오리속에서는 유소기에 이어 「제
2호 주자파로 낙인찍혀 실각했다. 모의 사망뒤 76년 초에는 모의부인 강
청 등 소위 4인방에 밀려 일체의 직위에서 해임당하기도 했다. 등은 이
를 모두 극복하고 다시 벌떡 일어났으며, 이로인해 부도옹이란 별명을
얻었다.
78년부터 시작된 「등소평시대」는 잘 알려진대로 개혁-개방의 시대였
다. 그러나 그는 경제개혁은 추진하면서도 정치개혁은 외면, 과감한 정
치개혁을 추진한 옛 소련의 「 바람」에 밀려 서서히 중국인들
로부터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 89년의 천안문 광장 시위때는 그의 이름
「소평」과 중국어발음이 같은 「소병」(작은 병)들이 낚싯대에 매달리는 수
모도 겪었다. 등은 이로부터 2년뒤인 90년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등은 아직 중국인에게 수수께끼같은 인물이다. 모택동은 전기와 각
종 저술을 통해 통치 방식과 사생활이 알려져있다. 20세기를 꽉차게 살
다가 간 등에 대한 진정한 이해도, 황제는 사후에 제대로 평가받는다는
점에서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