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염없는 제(95) +++.

태황제는 바깥채 뒤켠에 있는 사당에 들어갔다.

역대 신위앞에서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렸다.

태황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원군 신위에 고했다.

『아버지 생존시 자주 뵙지 못한 죄를 용서하소서. 돌이켜 보기에도
괴로운 일이나, 소자는 여러모로 불효를 저질렀나이다. 내자를 잘 다스
리지못해 아버지께 누를 끼친 일도 적지 않았소이다. 척신들의 오만과
농간을 막지 못한 것도 소자의 잘못이었나이다. 이제 나라의 운수가 다
하여 왜국에 예속되는 처지에 이르렀나이다. 이 모두 소자가 인심을 얻
지 못하고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지 못한 탓이오이다. 아버지께서는 세
차례나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나, 소자는 숱한 변
란과 침탈을 겪은 끝에 바야흐로 망국의 벼랑끝에 서게 되었나이다. 소
자의 부덕을 용서하여 주시고, 5백년 종묘사직이 보전되도록 힘과 지혜
를 보태주소서.』.

살아있는 사람에게 말하듯, 극진하고 절실한 것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대원군이 듣고 싶어했던 것이리라.

『아들아! 네 잘못만이 아니다. 나의 불찰이 컸느니라. 네 할아버지
의 산소를 덕산으로 옮길때 두사람의 왕자가 나오는 명당이라고 했다.
그예언은 맞았다. 새로 등극한 네 아들을 도와, 나라와 백성을 구제해
야 하느니…』.

태황제의 귀엔 이런 대원군의 대답이 들렸을지도 모른다.

이날 태황제는 운현궁에서 점심을 대접받고 환궁했다.

한편 「이토」통감은 이완용을 불러 새로운 한일조약안을 드리대고
『일자일구의 수정도 불가하오. 그런줄 알고, 빨리 각의에서 통과시
키시오.』하며 독촉을 했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함께 입궐하여 황제를 뵙고 「이토」통감의 말을
전했다.

『경들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황제는 조약안을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반대한다고 해
서 될 일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한일조약안의 내용.

일. 한국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일. 한국정부의 법령제정 및 행정상의 처분은 사전에 통감의 승인을
받도록 할것
일.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행정사무와 구별할것
일.전 한국의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시행할것
일.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 할 것
일.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없이 외국인을 관리로 초빙하지말것
일. 전번에 맺은 한일조약 제1항은 폐지할것.

외교권뿐 아니라 내정 전반에 관한 권한도 일본이 틀어쥐겠다는 것이
었다.

퇴궐한 이완용과 송병준은 곧장 동감부로 갔다.

임선준, 고영희, 조중응, 이병무등이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측에선 「이토」통감과 「하세가와」사령관외에, 외무대신 「하야시」
도 나와 있었다.

「하야시」는 신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귀임할 참이었다.

이완용과 「이토」가 각각 전권대표로 조약에 서명 날인했다.

사실은 조약을 맺기전 이완용과 「이토」사이에 비밀각서가 교환되었던
것이다.

한국군대의 해산, 사법권의 위임, 경찰의 통합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그것을 다른 대신들에게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몇년 뒤 합방조약 때 나라가 없어진 것으로 돼있지만, 이때 이미 나
라의 주권은 완전히 일본에 뺏았겼던 것이다.

이완용은 통감부를 나오면서 조중응에게 건네었다.

『이씨는 5백년넘게 종묘사진을 지탱해왔소. 정감목의 예언은 아니지
만 이제 운명을 다한거요. 종묘사직은 망해도 백성은 살려야할것 아니오.
사람들은 우리를 매도하고 있지만, 누군가가 멍에를 메야할것 아니오.
조금도 심란해할것 없어요.』.

『동감이오이다. 태황제가 나라를 이지경으로 만들었소. 누가 누구를
원망한단 말이오.』.

조중응의 맞장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