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염없는 제국(94) +++++.

이완용 등 대신들은 궐 안에 있을 수도 귀가할 수도 없어 진고개 송
병준이 묵고 있는 여관에 있었다.

이들은 각부 대신의 직인을 여관방에 옮겨 놓고 서류를 결재했다.

이완용은 황제의 전위식을 중화전에서 거행할 것을 주장했으나 황제
는 수옥헌에서 시종과 내관들만 배석시키는 가운데 조촐하게 지내기를
고집했다.

황제로서의 마지막 저항이며 하염없는 몸부림인 셈이었다.

황태자는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고 식전에 나오지 않았다.

이럴 경우 여러 차례 사양한 다음 마지못해 보좌에 오르는 것이 궁중
의 관행이요 법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제의 거조는 조금은 유별난 것이었다.

황태자가 대령하고 있는 방에 나타나
『허례허식은 필요없다. 어서 전위식에 나오라!』.

오기를 띠고 말했다.

식전은 침통하고 초라한 것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환관과 내관들이
적지 않았다.

벼슬아치라곤 궁내부의 관원들만 배석했다.

축복과 광명이 아닌 비통과 암흑 속의 새 황제 순종의 즉위였다.

조선왕조 27대 임금으로 이 때 나이 28세이다.

연호를 광무에서 융희로 고쳤고, 새 황제는 처소를 경운궁에서 창덕
궁으로 옮겼다.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개칭하고 태황제의 궁호로 삼았다. 계제에 대안
문도 대한문으로 바꾸었다.

태황제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여러 해 찾지 않았던 운현궁으로 거둥
했다.

『도성안의 치안이 좋지 않으니 분부를 거두소서.』
시종들이 만류했으나 태황제는 끝내 고집을 피웠다.

『임금자리를 내놓은 나를 어느 누가 해치려 한단 말인가.』
어가는 시위대 군사들이 호위했다.

사람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비통한 낯으로 어가를 지켜 보고 있었다.

『폐하! 이것이 대체 어찌된 일이오이까.』
『어찌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들을 그대로 놔두신단 말씀이오이까.』.

곳곳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곡성이 울리기도 했다.

운현궁 문전은 발디딜 틈도 없다시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위대 군사들이 군중을 헤치며 가까스로 길목을 텄다.

어가에서 내린 태황제는 감회어린 눈으로 군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
다.

백성들은 모든 일을 알고 있다.

임금이 바뀐 곡절과 까닭도 훤히 알고 있다.

무지한것 같으면서도 잘잘못을 꿰뚫어 보는 것이 백성들의 눈이기도
하다.

재위 40여년, 그동안 나라는 사나운 물결에 휩쓸린 한쪽의 나뭇잎 같
았다.

백성들 생계는 도탄에 빠지고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
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나를 임금으로 섬기었고 지금도 충성심을 간직하
고 있다….

태황제의 심중엔 이같은 회포가 오락가락했을 것이다.

태황제를 마중한 사람은 이재면과 아들 준용, 그리고 대원군의 조카
재완과 재원 등이었다.

재면은 지금 육군부장(부장), 재원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있다.

태황제는 별당에서 이들의 문안 인사를 받고, 안채에 들어 모친이 거
처하던 방을 둘러보기도 했다.

대원군과 부대부인이 돌아간 지도 어언 10년. 황제의 뇌리엔 어릴 적
의 기억이 새삼스레 되살아난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