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의 그물로는 건져내기 어려운 두편의 개성있는 유럽영화
「치킨」과 「야수의 날」이 비디오로 출시됐다. 서부극, 스릴러, 코
미디 등의 장르영화는 대중에게 익숙한 형식으로 편안함을 주지
만, 오랜 세월 반복되어온 장르적 관습탓에 진부하게 느껴지기가
쉬운 것도 사실. 이번에 출시된 「치킨」과「야수의 날」은 좌충우돌
하는 독특한 영화적 상상력으로 코미디에서 스릴러까지를 넘나들
며 진행되는 장르파괴적인 영화들이다. 할리우드의 잘짜인 스릴
러에 젖어있는 관객에게는 당혹감을 안겨줄지도 모르지만, 이 두
편을 통해 판타지 영화의 재미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치킨」( 출시)은 「델리카트슨」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 치킨전문점에서 일하는 두
요리사가 기이한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과정을 과장과 익살
로 그렸다. 이 영화의 가장 특이한 점은 허구와 현실이 교묘하게
비틀려 표현된다는 점. 지루함을 달래려 두 요리사가 주고받는
연쇄살인범의 이야기와 그들의 현실이 맞물려 어디까지가 허구이
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알 수 없게 진행되고, 영화속 장면들
은 종종 훔쳐보는 자와 미행하는 자 등 이중삼중의 시점으로 겹
쳐져 표현된다.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고, 듣는 자와 말하는 자, 혹은 보
는 자와 보이는 자의 구분까지도 무너뜨리는 「치킨」의 형식적인
특성은 「단 하나의 객관적인 진실」에 대한 영화적인 조롱으로까
지 여겨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제까지의 스토리가 사실은 영화
를 제작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감안하면, 결국 이
영화는 영화만들기와 영화보기라는 매커니즘까지도 도마위에 올
려놓는 셈이다. 사실주의적인 시각에서 보면 구멍이 숭숭 뚫려
보일 정도의 엉성함이 있지만, 파격을 대하는 재미가 적지 않다.

「야수의 날」(우일 출시)은 SF컬트 「액션 무탕트」를 통해 소
수의 영화광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스페인 감독 알렉스 드 라 이
글레시아의 작품이다. 성경에 숨겨진 암호를 해독해 크리스마스
에 사탄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믿는 한 신학교수가 사
탄을 없애기 위해 하루동안 분투한다는 내용을 다뤘다. 악마주의
적인 가사를 과격한 사운드에 실어 노래하는 헤비메탈 그룹, 멸
망에 관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불티나듯 팔리는 심령과학 서
적, 극우 인종주의자들의 테러가 횡행하는 대도시의 밤거리 등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지닌 요소들이 삽화로 빈번히 삽입되어 독
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우스꽝스럽게 생긴 신학교수의 얼굴, 신학교수와 그
를 추종하는 레코드점 주인이 벌이는 돈키호테적인 행동, 순결한
피를 제공하는 처녀 희생자의 얼빠진 표정과 성격 등의 코믹한
요소는 보는 이를 잔뜩 긴장하게 하는 스릴러적인 기본 설정과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면서 고정관념의 허를 찔러댄다. 과대망상
과 문명비판, 악마주의와 신비주의가 뒤범벅된 엉뚱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