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걸도 역사도 잡초속에 흩날리고… 유비-장비의 고향을 가다
일찍이 중원에 수많은 전쟁이 있어, 큰일을 이룬 이 세 사람이라.그때
깃발은 산천을 뒤흔들었고, 그들이 남긴 연기는 구름을 휘감았도다.(명나
라 왕세창의 찬 도원삼결의에서).
도원삼결의. 나라를 위해 함께 힘을 모으고, 한날 한시에 죽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길 것을 맹세한 유비 관우 장비. 삼국지를 드는 순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첫 장면이다. 삼국지에 따르면 이들이 굳은 의기
를 맹세한 곳은 장비의 집 뒤뜰 도원이다.
도원은 유비의 고향인 대수루상촌에 인접한 곳으로, 당시 탁주현에 속
해 있었다. 아득한 과거 역사로만 느껴지던 그곳이 갑자기 눈앞에 다가왔
던 것은 어느 중국 대학생과 대화하면서였다. 놀랍게도 도원결의가 이뤄
진역사 현장은 삼국지 당시 지명을 그대로 간직한 채 베이징에서 남서쪽
으로 불과 60㎞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즉시 삼국지 현장
으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
● 가게마다 「도원」 「충의」 등으로 장식한 간판.
베이징을 떠나 남서쪽으로 1시간. 멀리 탁주를 알리는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예정 시간보다 1시간이나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2년전개통된 경심공로 덕분. 베이징에서 선전(심수)에 이르는 경심공로
는 중국 남북을 잇는 왕복 4차선 고속도로. 95년 부분적으로 개통된 중
국의 혈맥이다. 톨게이트를 지나 탁주로 접어들자 도로 양쪽에는 주변
환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층 아파트 10여채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중심지인 고루대가 양쪽에는 신발 밥그릇 등 살림 도구를 비롯, 남쪽특
산물로 보이는 귤과 사과 등 과일 행상들이 가득했다. 거리 시장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다른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이한
거리 풍경을 찾아낼 수 있었다. 대수루찬관 도원반점 도원삼결의 충의소
매부. 1천8백년전 삼국지 현장을 떠올리게 하는 품격 높은(?) 말들이 식
당과 약국 쌀집 호텔 간판으로 둔갑, 거리를 치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우·장비 초상화와 크고 작은 쿵푸 도장, 흙으로 높게 쌓은 붉은 토담
벽등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 역사서에 따르면 탁주 지방은 베이징과 정
저우를 잇는 교통 중심지로 2천년역사를 갖고있는 유서깊은 도시이다.
하늘 아래 제1의 주라고 일컬어졌던 탁주는 화북 지방에서 가장 발달한
옥수수 곡창 지대이자, 베이징에 공급되는 채소 재배지로도 유명하다.
대수루상촌은 잘 알려진 대로 삼국지 주인공인 유비의 고향이다. 그
러나 그 전에 들리지 않을 수 없는 곳은 충의점이란 마을이다. 장비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세 사나이의 결의가 이뤄진 장비의 집 뒤뜰 도원을
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렝다. 충의점은 탁주 중심가인 고루대가에서
남서쪽으로 4㎞ 떨어진 곳에 있다. 베이징과 정저우를 잇는 철도를 따라
송림점역사란 곳을 지나자 충의점이란 작은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마차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10분 정도 들어가자 천막벽으로
둘러싸인 붉은 색 단층 기와 건물이 나타났다. 장비를 모신 사당이었다.
● 홍위병도 못 건드린 우물 「장비점」.
그러나 용장 장비의 사당임을 알려주는 설명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건립 시기가 96년 여름임을 알리는 공사도와, 사원 구석에 내팽
개쳐진 한장환후고리라는 비문만이 장비 사당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
였다. 환후는 장비의 시호이다. 사당 뒤쪽에 마련된 묘지는 의리와 용기
의 대명사인 장비의 신화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꾸며져 있었다. 초라한
크기에 잡초만이 무성했다. 그나마 장비 묘 한쪽 부분은 흉칙하게 떨어
져나가고 없었다.
역사의 향기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장비의 사당은 짐작했듯이 이미
홍위병들이 지나간 뒤였다. 장비의 후예라는 장씨 성의 한 마을 주민은
70년에 홍위병들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일장팔척의 창을 가진 장비 동상
이 사당 한가운데 모셔져 있었다고 말했다. 사당 기둥에는 청의 건융제
가 「웅대한 용기는 늙은 조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밝은 지략은 한
왕실을 다시 일으킬지니」(웅규규 혁쇄노조간담 안정정 간정한실하산)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마을사람들은 전한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볼수 있었던, 그러나 이제는 신화로만 남게된 장비 사당의 옛날 옛적 이
야기인 것이다.
울긋불긋한 싸구려 페인트로 채색된 사당은 그러나 올 여름부터 유
료 관광지로 개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장비묘에 이어 발길을 돌린 곳은
장비의 호연지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장비의 우물이었다. 삼국지에 따
르면 장비는원래 도장이란 곳에서 돼지 도살업을 하며 살아온 인물이다.
천하 호걸과 교제하기를 좋아한 장비는 언제나 돼지고기 한 덩어리를 문
앞에 있는 낡은 우물 속에 넣어두고 천 근이나 나가는 돌을 덮어 두었다
고 한다. 그리고 돌 위에는 『이 덮개를 여는 사람은 속에 있는 고기를
가져가도 좋다. 돈은 필요없다』는 글을 써 놓았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장비가 관우를 만나는 것은 이 우물 때문이었다. 관
우가 우물 위 천근 돌을 가볍게 들고 고기를 꺼내 유유히 사라지자 장비
가 뒤따라가 시비를 걸면서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장비가 힘 자랑을 하기 위해 녹두를 손으로 깨면
서 싸움으로 비화, 결국 중재자로 유비가 등장하면서 도원결의가 이루어
진 것이다. 유비가 싸움을 말리면서 던진 말은 『사나이는 무릇 나라를
위해 힘을 써야만 하는 법. 어찌하여 그대들은 이렇게 작은 일에 분개하
는 가』라는 명언.
장비·관우 두 장사의 싸움을 말린 유비의 행동은 「일룡분이호」라는
말로 후에 고사성어로 쓰이게 됐다. 세 영웅을 한곳에 모으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장비의 우물은 원래 이름이 장비점. 주민들은 그러나 영웅 이
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 장비 고향의 지명
이기도 충의점을 우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우물은 장비 사당에서 불
과 1㎞ 떨어진 곳에 있었다. 우물은 녹슨 철망에 둘러싸인 채 옛날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홍위병들도 손을 못댄 이유는 우물이 단단한 돌로 되
어있기 때문. 지름 50㎝, 깊이 2m 정도의 우물은 용 모양이 새겨진 둥그
런돌 조각으로 감싸져 있었다. 우물 안쪽에는 물 대신 먹다 남은 옥수수
몇 개만이 버려져 있었다. 우물 옆에는 청조에 탁주의 장관이었던 동국
익이 쓴 비문이 모진 풍상을 견디면서 서있었다. 강희 39년(1700년)에
쓴동국익의 비문은 한장환후고정비란 이름으로 비석을 세운경위가 기록
돼 있었다. 『도원의 뜻을 기리고, 장비의 옛 우물의 역사에 감동하여 자
금을 모아 유적을 복원한다.』.
● 『청초에 옮긴 도원 진짜 위치 아무도 몰라』.
장비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호탕한 기질에다 팔척 크기의 창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달려가는 무사 이미지이다. 그러나 장씨 동족촌인 충
의점에서 장비 이미지는 힘의 대명사와 함께 「선화미인」, 즉그림을 잘
그리는,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장비가서화에
능했다는 것은 중국 역사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청조의 대표적
문장가 기효람은 자신의 시에서 「훌륭한 탁본의 마애 글씨가 차기장군
(장비)의 자필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라며 장비가 훌륭한 문장가였
음을 밝히고 있다.
도원은 어디에? 장비의 흔적을 살피다 문득 탁주를 찾아온 가장 중요
한 여행 목적이 떠올랐다. 그러나 장씨 주민들은 이같은 질문에 의외의
답을 던져 주었다. 『도원은 유비의 고향에 모셔져 있다』는 것이었다. 자
세한 내막을 들어보았다. 장씨 주민들에 따르면 삼국지에 나와있는 도원
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중국에서 한 명도 없다는 것. 그러나 대
수루상촌 내 유비의 집은 옛날부터 잘 알려져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초
도원을 현재 유비의집에다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어차피 의형제 관계인
사람이니까 큰형님 집에 함께 모아두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판단, 당시
지방 장관이 도원을 유비 집으로 옮기게 됐다는 것이다. 적벽대전 현장
이 어디인지 아직 모르는 것처럼, 도원의 위치는 지금껏 베일에 싸여있
는 셈이었다.
충의점에서 대수루상촌까지는 5㎞ 정도. 현재의 대수루상촌에 있는
유비의 집은 사당으로 변해 있었다. 사당은 그러나 의외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칙건삼의궁」(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삼의궁을 짓는다). 3m 높이 벽으
로 둘러싸인 유비 사당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때마침 대문 왼쪽
에서 관리사무소 직원이 걸어나왔다. 한국에서 취재차왔다는 말에 『지
하오』(극호)를 연발한 직원은 자신을 유비 후손 유기렴이라고 소개했다.
유씨는 현재의 삼의궁은 지난해 9월 완성된 최신식(?) 사당으로 원래는
「유비의 궁전」이라고 하던 유비의 사당이었다고 전해줬다.
삼의궁 크기는 전부 1천평 정도. 70년까지만 해도 유비 사당은 성스
러운 모습으로 꾸며져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비묘가 그러했듯 홍위병
들은 유비에 관한 전설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사당 안 뽕나무와
복숭아나무, 숲처럼 늘어서 있던 수많은 비문, 2m 크기의 대추나무로 만
든유비 관우 장비 3인 조각 동상, 촉한의 문신과 무장의 석고상….이 모
든 것들은 혁명 구호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
서 용케 살아남았던 것은 명 시대의 구룡비와 흙으로 쌓은 대문. 그러나
95년부터 시작된 복원 과정에서 이 두 가지 역사 유물은 또다시 사라져
야만 했다. 나무로 깎은 유비상과 세사람을 기리는 위패, 뒤뜰 복숭아
나무. 현재 삼의궁을 이루는 내부구조물은 모두 최근에 복원해낸 가짜유
물유적에 불과한 것이다.
● 소열제묘비는 재외 유씨 화상들이 복원.
유씨의 목소리는 삼의궁이 자물쇠로 채워진 이유를 묻는 부분에서
갑자 기약해졌다. 운영권에 관한 계약 내용과 관련해 건설업자와 탁주시
가 대립,문제가 법정으로 번지면서 삼의궁은 복원 이후 아직까지도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것. 가짜라도 보지 못한 채 베이징으로 발길을 돌리
려던 필자에게 유씨는 최근 복원된 유비의 소열제묘 유적이 근처에 있다
며 함께 가자고 말했다.
소열제는 유비의 휘호이다. 삼의궁에서 북서쪽으로 4㎞. 소열제묘로
가는 좁은 골목길엔 옥수수 줄기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마을 이름은
유비시대 이름 그대로인 대수루상촌이었다. 북방식 단층집들로 밀집된
대수루상촌은 유씨 동족촌이기도 하다.
마을을 벗어나자 갑자기 끝없는 들판이 나타났다. 유씨가 가리키는
쪽으로 눈을 돌리자 들판을 배경으로 서있는 비문 하나가 보였다. 한소
열황제유비고리. 막 만들어낸 듯한 3m 높이의 대리석비문 속에는 서기
161년부터 223년에 걸친 유비의 인생사가 간단히 기록돼있었다. 소열제
묘는 원래 당 시대 이후 유비를 기리는 문장가들이 한번씩 들렀던 곳이
다.
그들이 남겼던 수많은 문화 유산은 물론 문화혁명 때 모두 사라져버
렸다. 지금의 소열제묘비가 다시 세워진 것은 불과 1년전인 지난해 3월.
과 거주 유씨 화상들은 비문 건립과 함께 3월 초하루를 유
비제사일로 잡고 매년 행사를 벌이기로 했다고 마을 주민들이 알려줬다.
후손들에게 철저히 파괴된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는 외국에 살고있는
돈많은 후손들에 의해 비로소 옛모습을 하나씩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세월이란 과연 이렇게 덧없는 것일까? 베이징으로 발을 돌릴 때
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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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결의는 세번이었다"
유비 고향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 세 호걸 인간적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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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주에는 희한한 얘기가 하나 있다.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나이들의
맹세인 도원결의가 한 번이 아닌 무려 세 번에 걸쳐 이뤄졌다는 민간
설화가 그것이다.
유비 사당을 지키는 57세손 유기렴씨가 전하는 도원삼결의 「3막」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1막은 삼국지에 나와있는 것과 동일한 내용으로,
관우 장비 두 호걸의 싸움을 뜯어말린 유비의 제의로 이뤄진 도원결의
를 말한다. 이 세 사람은 이후 의형제로 서로 돕고 지내게 된다. 그러
나 탁주 깡패인 요빈이란 인물이 나타나면서 형제간 의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요빈은 몸집과 얼굴이 관우와 비슷해서 항상 관우의 이름을
팔면서 나쁜 짓을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장비는 요빈이 벌이는 나
쁜짓을 관우의 행동으로 알고 관우를 비방, 결국 두 사람은 다시 주먹
다짐을 했다. 유비가 나타나 진상을 파악하면서 세 사람이 다시 도원에
모인 것이 제2막 도원결의라는 것.
도원결의 제3막은 황건적 토벌을 둘러싼 장비의 이견에서 비롯했다.
잘 알려져있듯 당시 시대적 상황은 조정의 부패와 몇 해 계속된 재해로
서민들생활고가 극에 달했을 때이다. 이런 불만을 배경으로 황건적이
창궐했다.
위협을 느낀 조정이 각지에서 서둘러 병사를 모집할 때 유비와 관우
는 국가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기꺼이 나서려 했다. 그러나 장비는 어리
석은 황제를 위해 힘을 쓸 필요가 없다며 황건적 토벌에 나설 것을 반
대했다. 결국 유비의 설득으로 황건적 토벌에 장비도 참여하게 되지만
이과정에서 유비 관우 장비는 또다시 향불을 피우고 의형제로서 결의를
다져야만 했다는 것이다. 탁주에서만 들을 수 있던 3차에 걸친 결의 얘
기는 영웅호걸 유비 관우 장비가 아닌, 인간으로서 세 사람에 대한 평
가라는 점에서 중국식 민간 설화의 전형을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