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의혹과 설을 양산하고 있는 한보 사태. 눈덩이처럼 커가는 이
문민정부 최대의 스캔들 뒤에는 「한보의 로비」라는 키워드가 도사리고
있다. 이 단어를 빼놓고는 상식을 뛰어넘는 한보 스토리를 이어나가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91년 수서사건과 지난해 비자금 사건
에서도 한보는 「검은 돈」으로 얽혀든 전력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한보
의 로비가 사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연 이번에 은행 금고를 사고화하는 데 한보의 로비가 어느 정도 작
용했을까.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그 구체적인 사연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3조5천억원에 가까운 천문학적인 은행돈을 마음껏 주무른 한보의
괴력은 그 특출한 로비력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는 게 재계나 은행가주변
의 얘기다.

이미 한보의 괴력을 떠받쳐준 「배후 실세」의 존재에 대해서는 다양한
증언이 흘러나오고 있다. 채권은행단의 한 은행장은 최근 『지난해 하반
기 영향력 있는 금융당국자가 한보철강에 자금을 대출해주라는 강력한
요청을 했다』며 『그뒤에 상당한 배경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 『100억원 벌기 위해 110억원 쓸 수 있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젊은 부통령」이나 「여권 4인방」 등 배후 실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대통령
의 차남인 현철씨와 민주계 실세 C , K의원, 의 L 수석과 또 다른
L수석 등이 주로 거명되고 있다. 물론 본인들은 자신들이 배후 실세로
지목되고 있는 데 대해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씨의 경우는 한
보그룹 정보근회장과 『호형호제하는 막역한 사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으
나 최근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일축했다. 지난해 봄 고대 동문
모임에서 정 회장을 대면한 게 처음이며 그 이후에는 전혀 접촉이 없었
다는 것이다.

L 수석의 경우는 정보근 한보그룹 회장과 동문이라
는 연줄이 주목 대상이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95년 11월27일
존 실버총장이 방한했을 때 만찬 모임에 나란히 참석했다. 정
회장은 80년대 후반 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땄고, L 수석은 80년
대초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사실 한보의 로비는 소수 실력자에만 집중되는 스타일은 아니다. 도
움이 될 만한 곳이면 아낌없이 돈을 쓴다는 게 한보의 「로비 철학」이다.

이는 한보그룹 총회장이 지난 수서사건 때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그는 『사업하는 사람들 중에는 1백억원을 얻기 위해 1억원
도 안쓰는 사람도 있으나 나는 90억원을 쓸 수도 있다. 앞을 내다보고
1백10억원을 쓸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보의 인맥이 얼마나 두터운가는 작년 6월23일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1단계 준공식 때 드러났다. 당시 전 통산장관과 당시 제
일은행장 외에 많은 민주계 인사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조종익 광업진흥
공사 사장, 사장, 조승만 고문 등 민주계
인사들이 앞줄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한보 그룹 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시 총회장은 대통령
과 막역한 민주계 모 인사를 통해 당진 제철소 준공식에 참석해 달라는
친서를 에 전달하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또 정 총회장은 93년 김
영삼 대통령의 중국 방문시 천진의 공단건설 현장에 가 있다 시찰차 들
른 대통령을 영접하는 등 권력 최고층과의 줄대기에 열을 올렸다.

총회장은 현 정부 출범 후 민주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는 데
많은 공을 들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을 내다보고 투자한다』는 평
소지론대로 앞날을 대비해 사람관리를 해온 것이다. 예컨대 민주계 핵심
실세인 S의원이 낭인생활을 하다 귀국했을 때 어느 재벌도 그에게 관심
을 두지 않았지만 정 총회장은 그에게 관심을 표명했다. S 의원과 인척
관계에 있는 P 전 의원의 보좌관 출신인 P씨(현 한보그룹 상무)를 영입,
이사자리를 줬다.

한보 비서실 출신의 한 전직 간부는 『민주계 인사들로부터 인사청탁
이 꽤있었는데 그럴 경우 총회장이 직접 당사자를 만나 채용 여
부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 총회장에게 민주계 실력자들이
전화를 자주걸어왔다』며 『정 총회장은 별도의 직통 라인을 갖고 있어 중
요한 전화는 직접 챙겼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보의 인맥쌓기가 얼마나 철저한가는 금융권 인사들과의 연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보 대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전 장의 친
동생인 이완수씨는 현재 한보건설의 조달담당 상무로 재직하고 있고, 장
명선 외환은행장의 친동생 장명철씨도 한보건설 부사장으로 재직중이다.

장명철 부사장은 지난 94년, 이완수 상무는 지난 95년 초 각각 입사해
한보의 인맥관리 차원에서 입사가 이루어졌다는 의혹이 짙다.

또 작년에 신설된 한보경제연구원 회장에는 JP와 가까운 이희일 전
동자부 장관이 영입돼 여·야 가리지 않는 한보의 파상적인 인맥 공세를
여실히 보여줬다. 총회장의 특출한 인맥관리는 91년 수서사건
때도 주목을 받았다. 당시 각종 인허가 과정에서 국세청, 등 전
직 공무원 출신 한보 임원들이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한때 건설업
계에서는 「대마도는 일본땅, 는 한국땅, 녹지는 한보땅」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한보의녹지 해제 로비실력이 회자되기도 했다. 현재도 한보
그룹에는 국세청 출신인 정일기 회장비서실장 등 관계 출신 10여명이 임
원으로 재직중이다.

한보의 로비력은 결국 총회장의 대담한 로비 스타일에서 나온
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다. 그는 평소 주머니에 수천만원을 넣고 다니다
아무 곳에서나 푹 찔러주는 대담한 「돈질」로 정평 나 있다. 액수 또한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수서사건 당시 평민당 이원배 의원은 『88년
총선 후 대학동창 소개로 정 총회장을 만났는데 「선거빚 값는 데 보태
쓰라」며 2천만원을 줬다. 이후 추석이나 연말에 만나면 꼭 2천만원씩 줬
다. 『아무런 조건도 없었다』고 그의 독특한 로비 스타일에 대해 양심선
언을 하기도 했다.

● 당진 제철소 준공식 때 민주계 인사 앞줄 차지.

재계에서는 정 총회장의 로비 스타일에 대해 금액이 크며 대상이 광
범위하고, 사안이 있을 때는 물론 평소에도 꾸준히 돈을 준다는 점 등을
특징으로 꼽고 있다. 철저한 현금주의와 사후주의 원칙도 빼놓을 수 없
는 요소라고 한다. 수표를 줄 때는 세무공무원 출신답게 뒷탈이 없도록
하는 배려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수서사건과 비자금 사건
때도 증명됐듯이 그의 「무거운 입」도 정평이 나 있다. 때문에 정계 일각
에서는 『정씨의 돈은 먹어도 소화가 잘된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한
보그룹 관계자들은 『 총회장이 로비에 상당히 신경을 쓴 것은 사
실이지만 그의 의리와 배팅규모를 알고 먼저 접근한 정치인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10만원 단위까지 직접 결재할 정도로 돈 관리에 철저한
정 총회장은 그룹의 모태인 한보상사 사무실로 쓰였던 종로 대광빌딩 종
친회 사무실에서 자금과 로비 관리를 해왔다.

한보는 지난 4.11 총선 때도 정계에 상당한 규모의 자금을 살포했다
는 의혹을 받고 있다. 재정위원인 정보근 회장 주도로 여당에
거액을 지원했다는 설이다. 에서 낙선한 K씨, L씨 등 자금을 지원받
은 후보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돌기도 한다. 이에 대해 측은
『정회장은 총선이 끝난 뒤인 작년 6월부터 재정위원에 위촉됐다』며 이같
은 자금지원설을 부인하고 있지만 한보의 로비가 총선이라는 호재를 그
냥 지나쳤을지 의문이다. 야당 의원들도 지난 총선 때 한보의 로비에서
비껴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정가 주변의 관측이다.

과연 한보의 로비에 대한민국 상층부는 녹아 내렸을까. 그 검은 커넥
션이 얼마나 파헤쳐질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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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옹」 일가… 이번에는 빈털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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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 사태의 주역인 한보그룹 총회장(74)은 「부도옹」이라 불
릴만하다. 91년 수서사건과 작년의 비자금 사건 등 역경을 딛고
재기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만약 이번 사태로 다시 수감되면 그는 3번
째 철창행을 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하지만 그의 「부도옹 신화」는 이번
으로 막을 내릴 공산이 크다.

23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정 총회장은 세무공무원 출신이다. 23년
여간 세무공무원으로 근무하다 74년 단돈 3백만원으로 사업을 시작, 80
년대 초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분양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큰
돈을 모았다. 그는 3공 시절부터 두둑한 배짱과 과감한 로비로 권력층과
접근하면서 기업을 키워왔다. 대통령 시절에는 사재로 지은 대한
노인회 중앙회관을 국가에 기증해 박 대통령으로부터 표창과 함께 감사
의 친서를 받기도 했고, 5공 시절 대통령에게는 새마을 사업에
쓰라며 5억원을 헌납해 포상받기도 했다.

정 총회장은 지금까지 네 번 결혼, 모두 4명의 아들을 뒀다. 첫째 부
인 김순자씨(59년 사망)와의 사이에 장남 종근씨(43)를 뒀고, 둘째 부인
이수정씨(83년 사망)와의 사이에서 원근(35), 보근(34), 한근(32)씨를
낳았다. 정 총회장은 특히 셋째와 네째 아들을 좋아해 그룹명도 이들 두
아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이들 중 셋째 보근씨는 작년 3월 한보그룹 회장에 취임했고, 막내 한
근씨는 그룹부회장과 금융소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또 맏아들 종근씨는
한보그룹 목재·관광 소그룹 회장, 둘째 원근씨는 한맥유니온 회장과 제
약소그룹회장직에 있다.

회장직에 있는 보근씨는 부친과 함께 폭넓은 대외활동으로 한보그룹
재기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강고를 졸업하
고 를 중퇴한 후 미국 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정 회장은
대외활동에서 「 인맥」을 무척 중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제대학원에서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한 경력을 앞세워 와 권력
핵심층 주변의 인맥과 친분을 쌓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보그
룹관계자들은 『정 회장은 한때 그룹 내 로비조직 해체를 검토하는 등 부
친의 구태의연한 경영스타일을 싫어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으로 이들 정씨 일가는 「빈털터리」가 될 공산이 크다. 숨겨놓은 재
산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룹 자체가 공중분해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장렬 주간부기자